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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물같이 바람같이 > 서상욱의 주역 산책
쇠약한 명 왕조, 어떻게 수명 연장?
서상욱의 주역산책<23> 천택리괘의 괘사와 구사는?
장거정의 화엄사상, 중국인과 이민족의 화합 추구
 
서상욱
구사 - 호랑이의 꼬리를 밟고 있는 것처럼 위험한 처지에 놓였지만, 두려움을 느끼고 신중하게 행동하면 물려서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자기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아서 역량에 맞추어 행동을 하며,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분수를 알게 되니 마침내 길하게 될 것이다. 색색(愬愬)은 혁혁(虩虩)과 같은 뜻으로 놀라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의태어이다. 지존(至尊)인 구오와 가까지 있고, 양이 양을 잇고 있으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육삼의 경우와 달리 북방의 문제를 해결한 사례를 살펴보자. 주원장이 건국한 명왕조가 후기로 접어들 무렵, 중앙내각에는 개혁을 표방하는 재상 한 사람이 등장했다. 그가 장거정이다. 그의 개혁조치로 쇠약해져가던 명왕조는 생기를 회복하여 근 100여년 동안 수명을 연장할 수가 있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망해가는 왕조가 생명을 연장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장거정의 일생과 그의 개혁조치가 상당한 작용을 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의 개혁조치는 부패한 관료기구를 쇄신하기 위한 정풍운동을 통해 국가기구를 유효하고 정상적인 조직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측면에 집중되었다.
 
또한 군사조직을 재정비하여 오랫동안 국가의 종립을 위협하던 외부의 침략을 제거하고,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줄여주면서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다지기도 했다. 그는 명왕조의 유명한 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역사상으로도 탁월한 개혁가로 평가된다.

장거정(1525~1582)의 조상은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 정원향(定遠鄕)에서 살았다. 선조인 장관보(張關保)는 명태조 주원장의 막하에서 일개 병졸로 출발하여, 대장군 서달(徐達)이 강남을 평정할 때 종군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명왕조가 개국한 후에 그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자귀현(秭歸縣)인 귀주(歸州) 장령(長寧)에 천호(千戶)를 세습하게 되었다.
 
장거정의 증조부인 장성(張誠)은 귀주에서 강릉(江陵)으로 이주했다. 할아버지 장진(張鎭)은 강릉의 요왕부(遼王府)에서 호위(護衛)를 역임했다. 아버지 장문명(張文明)은 자를 치경(治卿), 호를 관란(觀瀾)이라 했다. 장문명은 수재(秀才)에 해당하는 부학생(府學生)으로 7차례나 향시에 응시했지만, 결국은 합격을 하지 못했다. 아들이 한림(翰林)이 되자 그는 비로소 과거시험을 포기했다.

가정 15년인 1536년, 12살이 된 장거정은 형주부에서 실시한 시험에 응시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당시 지부(知府) 이사고(李士翶)는 시험을 치르기 하루 전에 옥황상제가 옥으로 만든 도장을 주면서 동자 한 사람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 날 그는 시험을 치르면서 응시생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장백규(張白圭)’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이 사고가 그 아이를 불러서 자세히 살펴보니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이 꿈에서 만난 동자와 같았다. 이사고는 백규라는 이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거정(居正)’이라고 이름을 바꾸게 했다. 그는 장거정을 따로 불러서 특별히 격려하며 분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사고는 다음해 실시되는 부학생 시험에 응시하라고 했다.

이듬 해 부학생 시험에 합격한 13세의 장거정은 형주에서 무창(武昌)으로 가서 향시에 응시했다. 이 때 그는 대나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록편소상외(綠遍瀟湘外), 소림옥로한(疏林玉露寒).

봉모총경절(鳳毛叢勁節), 지상진두간(只上盡頭竿).

푸른 빛은 소수와 상수까지 펼쳐져 있고,

탁 트인 숲에는 옥구슬 같은 이슬이 차갑게 맺혀있네.

봉의 깃털을 엮어 굳은 절개를 다짐하지만,

장대 끝에 매달기밖에 더하겠는가!

비록 유치하지만, 이 시에는 이미 그의 비범한 웅지와 재기가 엿보인다. 다음 해 향시에서 장거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성과 재능을 드러냈다. 당시 호광안찰첨사(湖廣按察僉事) 진속(陳束)은 그의 답안지를 보고 극구 칭찬하며 합격을 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호광순무 고린(顧璘)은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장거정은 크게 쓰여야 할 동량과 같은 재목이오. 13살에 불과한 아이가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교만해질 것이오. 소성에 만족하여 큰 뜻을 잃어버리면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한 번 좌절하게 만들어 분발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나중에 다시 기회가 와서 기량을 갖춘 후에는 큰 재목으로 자라 있을 것이오.”

고린의 반대로 장거정은 향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크게 자극을 받은 장거정은 더욱 분발하여 큰 인물로 성장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입각을 하여 재상이 되자 고린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가정 19년인 AD1540년, 16세의 장거정은 다시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이 때 고린은 지금의 호북성 종상현(鍾祥縣)인 안륙(安陸)에서 황하를 수리하고 있었다. 시험에 합격한 정거정이 인사를 하러 가자 그를 본 고린은 대단히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날 나는 자네를 합격시키지 않았다네. 결국 자네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불과 3년 만에 드러내고 말았네. 나는 자네가 곤붕(鯤鵬)의 뜻을 품고 이윤(伊尹)이나 안연(顔淵)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네. 어린 소년이 수재로서 이름을 날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

그는 자신이 매고 있던 물소가죽 허리띠를 풀어서 장거정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군은 나중에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맬 것이다. 그 때는 이 무소가죽 따위는 뒷간에 버려도 좋다.”

고린은 어린 장거정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자기의 어린 아들 고준(顧峻)을 불러서 소개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형주의 장거인(張擧人)이다. 이 사람이 크게 된 후에 네가 찾아가면 이 늙은 친구의 아들이라고 대접을 잘 할 것이다.”

장거정은 고린의 은혜에 감격하여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결심했다.

2년 후에 북경에서 회시(會試)가 시행되었다. 장거정도 북경으로 갔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와 다른 원인이 겹쳐 응시하지 못했다. 가정 23년인 1544년에 다시 회시에 참가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3년 후인 가정 26년 다시 회시에 참여한 정거정은 2등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서길사(庶吉士)로 선발되었다. 그 날 장거정과 함께 국가의 전고(典故)에 관한 토론을 마친 서계는 그가 출중한 기량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잡은 장거정은 3년의 기한이 만료되자 편수(編修)라는 직책을 받고 드디어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했다. 《명사(明史) 정거정열전》에는 장거정은 키가 크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수염이 배에 으를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또 일을 처리할 때는 용감하여 호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수보였던 엄숭이 서계와 사이가 좋지 않자, 서계와 가깝게 지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감추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희대의 간신이었던 엄숭도 그의 기량을 높이 평가했다.

장거정이 정치무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 명왕조는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종(武宗)의 뒤를 이어 AD1521년에 제위에 오른 세종 주후총(朱厚熜)은 무종의 아들이 아니었다. 무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대학사 양정화(楊廷和)가 태후의 명을 받들어 종실인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의 아버지 주우항(朱祐杭)은 헌종의 아들이자 효종(孝宗) 주우탱(朱祐樘)의 동생이었다. 조카가 후사를 이은 것이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 흥헌왕(興獻王)에 대한 예우문제가 대두되었다. 주우항은 이미 죽었으므로 제사의식과 칭호에 대한 논쟁이 집중되었다. 양정화는 효종을 ‘황고(皇考)’로 흥헌왕을 ‘황숙부(皇叔父)’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그의 의견을 물리쳤다. 그러자 진사 장총(張璁)이 친부를 종준하고자 하는 세종의 뜻에 따라 흥헌왕을 황고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은 효종을 ‘황고’로 흥헌왕과 세종의 생모인 왕비 장씨(蔣氏)를 추존하여 각각 ‘제(帝)’와 ‘후(后)’로 부르고, 앞에 황(皇)이라는 존칭을 생략하는 선에서 일단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을 '대례의(大禮儀)'라 한다.

국가의 안녕이나 민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와 같은 문제가 조정의 주요한 논쟁거리로 등장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실질보다는 허례와 명분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었다는 당연한 이유도 있지만, 그것을 기회로 황제의 눈에 들어 권력을 확보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다.
 
AD1524년인 가정 3년, 장총과 남경형부주사 계악(桂萼)은 효종을 ‘황백고(皇伯考)’로, 흥헌제를 ‘황고(皇考)’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시 양정화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번에는 세종도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사 양정화와 예부상서 왕준(汪俊)을 파면시켰다. 흥헌제는 본생황고(本生皇考), 장씨는 본생황모(本生皇母)라는 존칭을 얻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간관들이 하옥되고, 장총과 계악은 한림학사로 발탁되었다. 엉뚱한 존칭에 연연하던 세종은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그는 조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생(本生)’이라는 두 글자도 삭제하라고 명했다.

그 때까지도 신하로서 기백이 남아 있던 조신들은 양신(楊愼)을 대표로 내세워 약 200여명이 궁문에서 통곡을 하며 시위를 했다. 세종은 그들을 모두 하옥하거나 변방으로 내쫓았다. 매를 맞아서 죽은 사람도 19명이나 되었다.
 
세종은 그 해에 효종을 ‘황백고’, 황태후를 ‘황백모’, 친부인 흥헌왕을 ‘황고’, 어머니 장씨를 ‘성모(聖母)’로 부르라는 황명을 내려 이 논쟁을 종결지었다. 이 사건 이후로 명왕조의 강직한 간관들을 대부분 사라지고, 조정은 황제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게 되었다.

세종은 내시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엄격히 관리했지만,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는 않았다. 그의 정치는 보잘 것 없었다. 게다가 중기 이후로는 도교에 심취하여 오랫동안 정치는 등한시하면서 제단을 쌓고 기도에 전념했다. 최고통치자가 정치에 전념하지 않으면 반드시 권력을 농간하는 자가 나타난다.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이르렀고, 우매한 황제는 간신들에게 휘둘려 국정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수많은 충신들이 피살당하고 아첨꾼들이 득세하자 백성들은 참다못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남쪽에는 왜구가 창궐하고, 북쪽 변경으로는 북방의 이민족들이 수시로 침범했다. 이러한 정국의 혼란은 170여년을 이어온 명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장거정이 한림원의 편수로 있을 때 내각의 수보는 하언(夏言)이었다. 당시에 북부 변경은 하투(河套)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몽고족 엄답부(俺答部)가 끊임없이 침략을 계속하고 있었다. 수보에 임명된 하언은 적극적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 증선(曾銑)을 섬서삼변통수(陝西三邊統帥)로 임용했다.
 
증선은 하언의 기대에 부응하여 여러 차례 엄답(俺答)을 물리치고 적의 남하를 막은 후에 작전방략을 수립하여, 일거에 하투지역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하언은 그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명세종에게 주청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명세종은 유별나게 미신을 믿고 있던 혼미한 군주로서 자신의 결정을 수시로 번복했다.

가정 40년인 AD1561년 11월, 궁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황후가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 이미 내각에 들어와 있던 명왕조 최대의 간신 엄숭(嚴嵩)은 이 기회를 타고 명세종에게 주청을 올려, 화재의 원인이 증선이 변경에서 일으킨 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엄숭은 본래 기도문을 잘 지어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의 아들 엄세번(嚴世蕃)도 세종의 신임을 얻어 부자가 함께 악정을 베풀었다.
 
세종은 엄숭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세종은 증선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언은 증선을 잘못 기용한 책임을 지고 수보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엄숭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각종 죄명을 날조하여 끊임없이 세종에게 하언을 모함했다. 우매했던 세종은 결국은 하언과 증선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희대의 간신 엄숭이 마침내 내각수보로 진출했다.

엄숭은 20년 동안이나 내각수보의 자리를 지켰다. 명세종과 엄숭이 합작하여 통치를 하던 시기는 명대 최대의 암흑기였다. 간교한 엄숭은 황제가 도교를 신봉하는 것을 이용하여 정권을 농간했다. 세종은 종교에 미쳐서 정치에 관한 일을 모두 엄숭에게 일임했다. 황제는 자금성을 나와 이궁(離宮)인 별장에 거처했다. 대권을 장악한 엄숭은 사당을 만들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공공연히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부패를 조장했다.
 
조정의 정치는 정상적인 궤도를 잃고 말았으며, 국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따라는 사람들은 출세를 했지만,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모두 곤경에 빠졌다. 엄숭은 자신의 당원들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하언과 증선 외에도 양계성(楊繼盛), 심련(沈鍊), 섭경(葉經), 서학시(徐學詩) 등이 엄숭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

이러한 정치 상황을 장거정은 냉정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는 당장 정면으로 엄숭과 부딪치기에는 자신의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면대결을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정거정은 가정 3년인 1554년에 병을 핑계로 고향 강릉으로 돌아갔다. 정치의 중심인 북경에서 떠나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행히 간악한 무리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일에 성공하더라도 다음에 어떻게 정치를 개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장거정은 예리한 눈으로 백성들의 삶과 사회현상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비친 관직사회는 지독한 부패로 곪아터질 지경이었다. 관료집단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조치가 가장 우선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는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면 이러한 시폐를 개혁하겠다고 결심했다.

가정 3년인 AD1577년, 북경으로 돌아온 장거정은 한림원의 장원학사(掌院學士)로 복직했다. 그의 스승 서계(徐階)는 내각으로 들어가 엄숭을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계는 장거정의 기량을 높게 평가하며, 적극적으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덕분으로 장거정은 우춘방(右春坊)의 우중윤(右中允)으로 승진했으며, 오늘날 국립대학교의 부총장에 해당하는 정6품 국자감사업(國子監司業)을 겸직했다.
 
총장격인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는 장거정과 함께 진사시험에 합격했던 고공(高拱)이었다. 그도 역시 대단한 재능을 갖춘 사람으로 서계의 제자였다. 서계는 고공의 기량도 높이 평가했다. 이 세 사람은 명조정의 신흥세력으로 엄숭의 전횡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옳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된다고 했다. 갖은 악행을 저지르던 엄숭도 결국은 가정 41년인 AD1562년 5월에 온 국민의 매도를 받으며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의 아들 엄세번은 벌을 받고 죽었다. 내각의 수보가 된 서계는 장거정과 고공을 동시에 유저(裕邸)의 강독관(講讀官)으로 옮겨 유왕(裕王)의 스승으로 삼았다.
 
유왕은 당시에 실제로 태자나 다름이 없었다. 미신을 신봉하던 명세종은 방사(方士)로부터 두 용은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죽을 때까지 유왕을 태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왕에게 후사를 잇게 한다는 유조를 남기기는 했다. 가정 45년인 AD1566년 명세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했다. 목종은 연호에 따라 융경제라고도 한다. 평범한 인물이었던 세종이 만력제 다음으로 긴 45년 동안이나 중국을 통치하는 동안 명왕조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장거정은 서계에게 선제가 남긴 유조(遺詔)의 형식을 이용하여 세종 시대의 여러 가지 폐정을 개혁하자고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장거정의 건의를 받아들인 서계는 장거정과 함께 유조를 작성하여 목종의 승인을 받았다. 세종 당시에 권력자였던 세종의 실정과 자신의 책임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서계는 가정시대에 탄핵을 받았던 인물들을 대거 복권시켜 조정 안팎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그가 수보로서의 명예를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은 장거정의 계책 덕분이었다.

목종의 스승이었던 장거정은 잇달아 승진을 거듭했다. 먼저 한림원의 시독학사(侍讀學士)와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한 그는 곧 이어서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 진출했다가 내각을 들어가 정무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명왕조의 핵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융경(隆慶) 원년인 Ad1567년 4월, 장거정은 예부상서 겸 무영전학사(武英殿學士)로 승진하여 다른 관리들이 감히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장거정이 세력을 강화하는 동안 정치의 중심인 내각에는 다시 격렬한 정치투쟁이 펼쳐졌다. 서계는 목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 장거정과 함께 시강(侍講)이었던 고공을 견제하려고 했다. 목종의 신임이 고공에게 집중될 우려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서계는 고의로 유조의 작성에서 고공을 배제했다.
 
그러나 고공은 유조가 발표되자 서계가 선제의 통치를 비난했다고 공격했다. 내각의 실권을 두고 서계와 고공 사이에 싸움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관들은 서계를 지지했다. 급사중과 어사가 나서서 고공이 법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고 집중적으로 탄핵했다. 결국 고공은 융경 원년 5월, 대학사에서 물러났다.

이듬 해 7월에는 서계가 목종의 잦은 외유를 막으려 하다가 반감을 샀다. 고공은 문하의 급사중을 동원하여 서계의 비위사실을 폭로하고 탄핵하도록 조종했다. 대학사였던 장거정은 서계의 사직을 받아들이라는 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관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서계는 장거정을 만나서 나라의 일과 집안의 일을 상의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세 아들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서계가 정치를 맡고 있을 때, 그는 세 아들은 서계의 권세를 믿고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그는 누군가가 그것을 거론할까 염려가 되었다. 서계는 나라의 일은 물론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도 장거정이 잘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서계가 물러 난 후에 이춘방(李春芳)이 수보로 임명되었다. 그는 무골호인으로 자신의 녹봉과 직위만 지킬 수 있다면 되도록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 장거정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단성을 갖춘 고공과 연합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거정은 사례태감(司禮太監) 이방(李芳)과 함께 목종을 찾아가 고종을 추천하고 그를 새로 기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건의를 받은 목종은 고공을 다시 내각으로 불러들이고, 이부상서를 겸하게 했다. 장거정과 고공은 다시 과거의 우정을 회복했다. 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국정을 보좌하며 현명하고 유능한 신진인물들을 대거 기용했으며, 각급 관리들을 관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평가를 실시했다. 조정은 새로운 기풍이 생겨났다.

장거정은 특히 국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우수한 장군들을 기용하여 변경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장거정의 본격적인 개혁은 국방문제 해결부터 시작되었다. 융경 4년인 AD1569년, 수보 이춘방이 사임한 후에 고공이 뒤를 이어 수보가 되었다.
 
장거정은 태자태부로 승진했으며, 건극전(建極殿) 대학사와 이부상서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직은 고공보다 낮았다. 권력을 장악한 고공은 몇 년 전 자기가 관직에서 물러날 때 서계와의 갈등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숨기고 언관들을 시켜 서계의 세 아들들의 죄상을 밝도록 했다. 서계의 세 아들은 차례로 징벌을 받았으며, 가산도 몰수되었다. 스승의 부탁을 잊지 않고 있었던 장거정은 고공을 찾아가 간곡하게 사정을 했지만, 고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장거정이 사계의 아들들에게 3만금의 뇌물을 받았다는 무고를 믿고 있다고 말했다. 난감해진 장거정은 고공의 면전에서 하늘에 두고 자신의 결백을 맹서한다고 빌 수밖에 없었다. 고공은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 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다.

장거정은 목종의 측근인 사례태감 풍보(馮保)와 친밀하게 지냈다. 고공과 풍보는 깊은 갈등이 있었다. 목종은 조회에 임할 때마다 인형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대학사들에게 결정을 위임했다. 목종이 죽고 태자 주율균(朱聿鈞)이 즉위했다. 그가 신종(神宗)이다. 풍보와 장거정은 함께 모의를 꾸며 양궁(兩宮)의 태후들 명의로 고공을 축출했다. 장거정은 내각의 수보에 올라 전권을 장악했다.
 
장거정의 정치적 기반은 또 하나의 세력인 환관과의 제휴였다. 그는 언관의 비판으로부터 환관들을 보호하여 황제의 지지를 유지했으며, 후궁과 외척을 비롯한 다양한 정치세력을 적절히 이용하여 세력균형을 이루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로서 그는 천하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었다. 본격적인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명초로부터 가정 말년까지 명왕조의 국방문제는 주로 북방의 몽고부족과의 분쟁으로 야기되었다. 원이 망한 이후 북방으로 돌아간 몽고족은 와자(瓦刺)와 달단(韃靼)으로 분할되었다. 그들은 세력이 분할되었지만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합하여 명의 북방을 침략했다. 명왕조는 만리장성을 부수하여 북방경영에 뜻이 없음을 나타냈지만,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명왕조 중엽 이후로 정치가 부패해지자 군사력도 급격히 약해졌다. 몽고 초원의 영웅을 자칭하던 알탄칸(唵答汗)은 끊임없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중원의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세종조에 알탄칸은 몇 차례나 관계개선을 요구하며 시장을 열러달라고 했지만, 세종은 몽고의 사신을 죽이고 통상을 거절했다.
 
이로써 민족간의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다. 목종 융경 원년 8월, 내각에 들어 온 장거정은 외침이 나날이 더해가지만, 변경의 일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고 보고하며 군비를 확충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우환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목종조에서 군대를 양성하고 국방정책을 개혁하는 중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장거정의 군사개혁은 우수한 장군을 선발하여 중임을 맡기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먼저 왕숭고(王崇古)를 선발하여 병부우시랑 겸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 임명하고, 섬서, 연수(延綏), 영하(寧夏) 등 3개성의 군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2년 후에는 산서(山西)와 선부(宣府), 대동(大同)의 군사까지 통솔하게 된 왕숭고는 서북의 변경을 튼튼히 하는 공로를 세웠다. 그 외에도 장거정은 담륜(潭綸),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 방봉시(方逢時)와 같은 장수들을 기용했다.

담륜과 청계광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친 공을 세웠던 유병한 군사전략가였다. 담륜은 원래 총독양광군무(總督兩廣軍務)였다가 북경으로 올라와 병부시랑 겸 우첨도어사로 임명되었으며, 총독계요보정군무(總督薊遼保定軍務)를 맡고 있었다. 나중에 장거정이 집권을 하자 병부상서가 되어 장거정의 군사개혁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척계광은 북경으로 와서 신기영부장(神機營副將)으로 임명되었다가, 계주(薊州), 창평(昌平), 보정(保定) 등 3진의 군사들을 조련하는 일을 맡았다. 이 지역의 총병(總兵) 이하 모든 관리들은 그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장거정은 그들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각자의 우수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했다. 그들이 군사부문에 대한 개혁안을 제출하면 장거정은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그들의 계획이 그대로 실행되도록 도왔다.

담륜과 척계광은 서쪽의 거용관(居庸關)에서 동쪽의 산해관(山海官)까지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돈대(墩臺)를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이 계획은 즉시 비준을 받아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는 명대에 시행된 대규모의 제2차 만리장성 수축공사였다. 공정이 시작되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퍼졌다. 대부분 돈대를 설치하여 적을 막는다는 발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담륜과 척계광은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거정은 곧바로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그들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장거정이 보낸 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돈대를 쌓아 험준한 곳을 지킨다는 계획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가장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멀리까지 바라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전투에 사용되는 돌과 화살을 미리 운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세를 이용하여 높이 막사를 지어 놓으면 군사들이 노숙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는 이일대로(以逸待勞)나 다름이 없으니, 적은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하고 아군은 적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 장군들께서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임무에 전념하시면 됩니다. 세상에 떠도는 허망한 말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지지와 신뢰는 두 사람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만리장성의 중수공사는 순조롭게 완공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 팔달령의 만리장성은 장거정, 담륜, 척계광 세 사람의 노력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장거정은 변경을 지키던 장군들에게 적극적으로 군기를 확립하고 훈련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라고 독려했다. 몇 년 후에 명의 방어력은 괄목할 정도로 막강해졌다. 그에 따라서 달단과 업답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남침도 줄어들었다.

북방민족에 대한 장거정의 정책은 강온 양면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군비를 확충하여 몽고족의 남침을 막아 변경의 우환을 제거하는 동시에 몽고의 각 부족에 대한 정책도 조정했다. 몽고족의 남침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었다. 농업기반이 거의 없었던 유목민족은 중원의 식량과 생활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중국과의 통상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북방민족이 영토를 점령을 하여 중원에 웅거할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면, 제한된 통상을 허용하는 것이 유리했다. 당시에 몽고족은 중원을 차지할 정도로 결집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장거정은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극단적인 적대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호관계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장거정은 북방의 변경을 지키는 장군들에게 몽고의 각 부족과 우호관계를 발전시킬 경로를 적극적으로 찾는 동시에 군사적 적대행위를 삼가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변경의 장군들은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선부와 대동의 총독이었던 왕숭고는 문고(文告)를 몽고의 각 지역으로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선무공작을 펼치도록 했다.

“명왕조에 투항하는 몽고인은 일률적으로 예에 따라 대우할 것이며, 무리를 이끌고 귀순하면 특히 후한 대접을 할 것이다.”

문고의 공작이 시행되자 몽고지역에 거주하던 한족과 몽고의 주변 민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투항했다. 융경 4년인 AD1570년, 엄답칸의 손자 바하나기(把漢那吉)가 부족을 이끌고 투항했다. 대동순무 방봉시는 선대총독(宣大總督) 왕숭고의 동의를 얻은 후에 기병 5백명을 파견하여 바하나기를 순무아문으로 영접하여 ‘잠시’ 편안히 거처하도록 조치했다.

‘잠시’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하나기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명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조신들은 바하나기를 받아들이면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들은 적당히 대접을 하다가 다시 몽고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더 강경한 반대파는 차라리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하나기의 귀순을 계기로 몽고와 관계개선을 생각했던 장거정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숭고에게 이 사건의 해결 방법과 책략을 제출하라고 지시하고, 목종에게 보고하여 사건의 처리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황제의 결정이 내려지자 반대파들은 대부분 목소리를 낮추었다.
 
왕숭고는 장거정의 지시를 받아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바하나기를 엄중히 보호하고 특별히 후하게 대접했다. 바하나기는 명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지휘사라는 관직을, 그의 부하인 아리카(阿力哥)는 천호(千戶)라는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들은 모두 명의 관리들이 입는 대홍저사의(大紅苧絲衣)를 상으로 받았다.

파한나기가 명조정으로 투항한 후 알탄칸과 그의 아들 신애(辛愛), 조카 영소복(永邵卜)이 각자 군사들을 이끌고 평로성(平虜城), 홍사보(弘賜堡), 위원보(威遠堡) 등 세 곳에 이르러 파한나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명의 국경을 짓밟겠다는 위협을 했던 것이다.
 
북방은 갑자기 긴장상태로 접어들었으며, 전쟁이 벌어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에서도 장거정은 냉정하게 사태의 본질을 분석하며 해결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는 각 병영의 장군들에게 철저하게 전쟁준비를 하도록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가능하다면 무력충돌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순무 방봉시는 장거정의 지시에 따라 포숭덕(鮑崇德)을 알탄칸에게 파견하여, 여러 가지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명조정이 파한나길을 후하게 대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포숭덕은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파한나길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하면서 알탄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대칸께서 이전에 명을 배반하고 몽고로 도망친 한인 조전(趙全), 구부(邱富), 이자성(李自聲) 등을 돌려보낸다면, 우리도 바하나기를 대칸에게 돌려보내겠습니다."

포숭덕의 설명을 들은 알탄칸은 여러 가지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여, 명조정이 자신의 손자를 후하게 대접해준 것에 감사한 후에 곧 철군했다. 이별할 질 때 그는 별도로 좋은 말 한 필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일단 명조정이 먼저 바하나기를 돌려보내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업답칸이 약속을 위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숭고에게 알탄칸이 명왕조를 배신한 조전 등을 먼저 돌려보내면 바하나기를 송환시키라고 지시했다. 그 해 12월, 안탄칸은 생각지도 않게 10여명의 배신자들을 묶어서 명조정으로 보냈다.
 
장거정은 즉시 명군의 호위 하에 바하나기를 송환시켰다. 유일한 손자가 명왕조에서 특별히 제작한 홍포를 입고 그의 장막으로 돌아 온 것을 본 엄답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는 왕숭고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이후로 다시는 명의 변경을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왕숭고는 장거정의 안배에 따라서 엄답에게 진일보한 양국의 관계개선을 요구했다. 명왕조는 봉공호시(封貢互市) 즉 엄답의 조공과 시장개방을 약속하고, 엄답을 왕으로 봉하는 한편, 그의 아들과 동생들에게도 명의 관직을 제수했다. 호시란 엄답과 그의 부하들이 일정한 시기에 제한된 물품을 가지고 명왕조에서 지정한 장소에서 통상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장거정과 왕숭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봉공과 호시에 관한 구체적인 협약을 체결했다.

융경 5년인 AD1571년 3월, 목종은 엄답을 순의왕(順義王)으로 봉하고, 기타 몽고의 각 부족 수령들을 도독동지(都督同知), 지휘동지(指揮同知), 지휘첨사(指揮僉事),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으로 임명했다. 동시에 엄답은 매년 1차례 명조정에 조공을 하고, 명은 감숙, 영하, 산서, 선부, 대동 등지의 10곳에 매월 2일 호시를 연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처음에는 관시(官市)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말을 거래하고 경과를 보아서 추후에 변경의 백성들도 각종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로 몽고족과 한족의 경제와 문화 교류가 황발하게 전개되어 두 민족 사이에는 당분간 특별한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책은 대외강경책을 주장했던 쇼비니스트 조정길(趙貞吉)과 충돌을 일으켰다. 수보 이춘방, 차보 고공은 찬성했지만, 반대했던 조정길은 결국 대학사에서 물러났다. 이 화의의 배경에는 당시에 변상(邊商)과 염상(鹽商)으로 크게 활약했던 산서의 상인 출신 관료들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그들은 화의와 더불어 장거정과 정치적 결합을 공고히 하여 조정의 핵심 관료로 성장했다. 북방문제가 해결되자 명조정은 막대한 국방비를 절감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장거정이 실시한 봉공호시정책은 2백년 이상 계속되었던 몽고 각 부족과 중원 왕조의 대립국면을 종결짓고, 몽고 각 지역과 명왕조의 사회와 경제 발전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다민족 통일국가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다. 융경 5년 말에 장거정은 자신의 심정과 각오를 담아 다음과 같은 두 구절의 좌우명을 발표했다.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과 사리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정치가로서의 숭고한 뜻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원이심심봉진찰(愿以深心奉塵刹), 불우자신구이익(不于自身求利益).

마음 속 깊은 곳에 무량세계를 받들기 바라지만,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겠다.

‘진찰’은 불교용어로 진진찰토(塵塵刹土)라고도 한다. 먼지와 같은 무수한 세계 또는 먼지처럼 미세한 세계도 국토가 있다는 뜻이다. 《화엄경(華嚴經)》에는 먼지나 가는 털끝도 모두 ‘찰(刹)’이 있고, 부처가 있어서 설법을 들으면 유익한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했다. ‘찰’은 지극히 미세하고 짧은 순간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브라만어로는 국토(國土)라는 뜻이기도 하다.
 
장거정이 《화엄경》에 나오는 용어를 인용한 것은 그가 광대무변한 세계와 지극히 미세한 존재 사이의 필연적 인과성을 중시하는 화엄사상에 심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화엄사상은 당왕조의 범세계주의를 형성했던 기본사상이었다. 장거정이 중국인과 이민족의 화합을 통한 세계화를 추구한 것은 그의 사상 저변에 있던 화엄사상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상욱 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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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4/20 [09:20]  최종편집: ⓒ 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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