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민족선도민족역사민족종교민족무교민족역학민족문화 로그인 회원가입 환타임스에 바란다 후원하기
뉴스일반칼럼기획물같이 바람같이민족언론동맹靈性동아리동맹환포터통신 환토방 바로가기
편집: 단기 4353.06.04 04:03 (서기 2020)
기획
`국민통합` 길을 묻다
유엔미래포럼 박영숙의 미래예측보고서
이송의 중국이야기-지략의 귀재
윤영용의 체험소설 `31move.org 봉황각`
고담의 미래소설 `거리검 축제`
세종대왕 통곡하다
쉽고 재미난 점성술 교실
황천우의 삼국비사
황천우의 연재소설 `매화와 달`
현정수의 수행소설 파라가테
환타임스 끝장기획
회원가입
환타임스에
바란다
후원해주세요
기사제보
HOME > 기획 > `국민통합` 길을 묻다
통합의 역사 인식-이승만 집권기
<환타임스 창간기획>'국민통합'길을 묻다<9>
김세중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민주화의 갈등과 의존구조'(상)
 
김세중
1.통합의 역사인식구조

본 연구는 1948년 건국 전후 시기부터 1987년 민주화가 달성되는 무렵까지 초점을 맞추어 한국 현대사를 통합의 역사로 인식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통합의 역사인식은, 구체적으로 한국 현대사의 주요 갈등 당사자였던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결과적으로 상보적 관계 속에서 한국사회 발전에 불가결한 구성분자로서 기능해온 것으로 이해하는 역사인식 태도이다.
 
통합의 역사인식은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다는 의미와 함께 한국사회에 현존하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치유라는 실천적 의미도 지닌다. 왜냐하면 사회적 갈등의 상당부분은 주요 행위 당사자들-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한국 현대사 속의 역할을 상호배제적 관계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배제적 역사관을 넘어 통합의 역사인식을 모색하는 노력은 우선 ‘근본주의적 민주운동사관(이후 민주운동사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민주운동사관의 핵심적 특징은 민주주의를 어떤 상황하에서도 타협될 수 없는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데 있다. 또 민주주의는 저발전등 사회적 문제 해결에도 가장 효율적 제도라는 것을 믿는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의 실천은 한국 현대사의 독점적 중요성을 지니는 과제가 된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사이고 민주-반민주 세력 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로 구성 된다. 이 구도 아래서는 조건반사적으로 민주주의의 고양을 명분으로 하는 집단과 운동은 역사의 선이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집단과 행위는 악으로 규정 된다.

이 역사관에서는 한국의 보수산업화 세력은 악의 세력으로 치부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집권기도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건국 이후 통치집단으로 등장하여 국정운영을 주도해왔던 보수산업화 세력의 집권 시기는 일인, 그리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권력구조를 특징으로 하였고 실제로 이 권력구조 아래서 시민의 기본권, 3권 분리, 법치주의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들이 때로는 자의적 훼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의 집권기는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산업혁명의 성공적 추진을 통해 대한민국이 근대 국민국가로 정립되는 토대가 놓인 시기이기도 했다. 민주운동사관은 이런 측면을 조명할 여지가 없으며, 이는 그것에 내포된 몇 가지 심각한 논리적 실제적 취약점에서 비롯된다.

첫째, 국가과제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 결여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정착은 대한민국의 중대한 국가과제이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로 출범한 대한민국은 그에 못지않은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보체제의 구축이 그 하나이다. 국가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울 때 어떤 여타의 가치추구도 어려운 것이고, 따라서 이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받기 힘들 것이다.
 
특히 건국이후 대한민국의 운명이 되어버린 전체주의적 북한과의 생사를 건 긴장된 대결 상황은 이 과제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했다. 경제발전은 또 다른 긴박한 과제이다. 적절한 정도의 국민적 후생은 근대국가의 통치 정통성 확보를 위한 기본조건이고 또 경제발전은 근대국가가 주권과 자주성 확보에 불가결한 기본적 하부구조를 구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절대빈곤이 풍미했던 한국적 상황에서 이 과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둘째, 민주주의 실천에 대한 단순한 가정이다. 민주운동사관은 민주주의를 민주화 운동, 즉 정치적 투쟁을 통해 획득되고 확립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우에 따라서, 민주주의는 엘리트 사이의 협약, 외부적 영향, 결의에 찬 소수의 투쟁을 통해 도입될 수는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장기 지속성을 띤 제도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중산층 위주의 사회계층 구조와 참여적이면서 극단이 배제되는 문화와 의식의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은 계층구조 변화와 새로운 의식 형성을 위한 불가결한 기반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정주도 집단이었던 보수산업화 세력은 무엇보다 국가과제의 복합성을 뚜렷하게 인식해왔던 집단이다. 즉 이들은 민주주의 못지않게 안보체제의 구축과 경제적 산업화의 중요성도 인식하였다. 또 민주주의의 실천, 특히 장기지속 민주주의 체제 확립을 위해 경제발전이 불가결한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은 민주운동사관의 이분법적 역사인식을 극복하고 안보체제의 구축과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한국이 근대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보수산업화 세력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적극적 인식이 민주운동 세력의 역사적 의미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논리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수산업화 세력의 경우에도 집권이 장기화되며 역사발전에 저해요인으로 변질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고, 민주화 세력은 그것에 도전하여 국면을 전환하고 한국의 또 다른 결여될 수 없는 과제인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즉 보수산업화 세력의 권위주의 집권체제는 집권이 장기화되면 예외 없이 권력구조가 경직화되고, 권력의 악마적 속성이 강화되며, 변화의 요구를 억제하여, 시대적 적실성을 상실한 권력으로 전락해왔다.
 
이는 구체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가 대중봉기 혹은 대중적 저항이 배경이 된 폭력에 의해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시대착오적 권력으로 변질된 이들을 퇴장시켜 새 시대 개막의 직접적 계기를 만든 것은 민주화 세력의 과감한 투쟁이었다. 이는 민주운동 세력의 제한된 역사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현대사 전개에 적극적으로 인정받아야 할 역할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 민주화 세력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 실천이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주요 요소라는 점에 비추어 그 존재 자체로도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은 안보체제의 확립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산업화를 핵심요소로 하는 성숙한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을 추구해왔고, 이 과제는 대개 80년대 후반에 진입하면서 성공적 결실을 맺는 것으로 평가된다. 위의 논의는 이 과정에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모두 결여될 수 없는 역할을 감당해왔음을 보여주고, 이는 통합의 역사인식의 필요성과 적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본 연구는 1948년 이후 한국역사 전개의 주요한 매듭을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로 규정하고 이것이 계기적으로 달성되는 과정에서 보수산업화 국정주도 세력과 민주화 대항 세력의 역사적 역할을 논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전개 과정에서 큰 쟁점을 이루었던 주요 사건 또는 현상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반추해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본 연구의 순차적 반추의 대상은 이승만 권위주의 체제, 4·19, 5·16, 군부 권위주의체제, 박정희 사망, 6월 항쟁이다. 이 작업의 전제로 먼저 분단국가로서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된 쟁점을 고찰한다. 아직도 분단책임론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이 논쟁의 대상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에 대한 인식은 대한민국 현대사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2. 단정노선의 불가피성과 대한민국 건국의 당위성

해방 후 역사가 분단으로 귀결된 것은 원인과 배경을 떠나 비극적 사태 진전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는 한국 현대사 전개의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제약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해방 정국에서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언급한 인물이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현실이 된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분단책임론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대개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비판자들은 이승만의 단정론을 권력욕에 빠진 이승만이 남한에 친미정부를 세우려는 미국정책에 앞장서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인식을 배경으로 일부 논자는 그가 건국을 주도했던 대한민국의 정통성까지 부정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단정론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다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분단을 주도한 것은 스탈린과 그의 지배하에 있던 북한이었다.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에 명시적으로 북한에 ‘부르주아와 민주주의공화국’의 형식을 가장한 독립된 통치체제를 수립할 것을 지시한다. 이 지시의 유효성은 소련군 총정치국장의 같은 해 12월 보고서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그 후 소련 군정은 조만식의 제거(1946. 1), 북조선 임시인민 위원회 발족(1946. 2), 토지개혁(1946. 3) 등으로 실질적으로 북한 지역을 정치적 차원뿐 아니라 경제적․사회적으로도 공산주의 원리에 따른 독자적 체제의 공고화 과정을 밟아 간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1946. 6) 북한이 위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을 밟은 후에 나온 것이다. 특히 이 과정이 모스코바 3상 회담과 미소공동위원회 진전 여부와 전혀 무관하게 소련 군정에 의해 일관되게 추진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당시 미국은 이미 종전 이전부터 한반도에 일방적인 반공 친미정부보다 소련과 절충이 가능한 좌우합작 정부의 수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종전 후에도 미국은 상당기간 좌우합작 노선을 견지하였다. 특기할 것은 냉전 징후의 가시화는 오히려 미국이 그에 의존하는 정부를 남한에 세워야 한다는 결정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적용하였다는 점이다. 남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반공적 대한민국 건국 노력은 적어도 1947년까지는 이런 미국의 안이한, 그리고 상이한 인식에 맞서는 고독하고 힘든 작업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은 좌우합작에는 공산주의로 가는 첫 단계로서의 의미 이외에는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 또 이념으로 그리고 국가경영원리로서 공산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일찍부터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승만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에 충실한 체제 건설을 선호했던 것은 단순히 냉전시대 국제적 권력관계 현실을 기계적으로 반영한 결과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시사한다.

이상의 논의는 친소공산주의체제를 수용하지 않는 한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은 불가피하고 필요한 선택이었음을 보여 준다. 더욱이 이후 역사 전개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당위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이 시점에서 북한과의 우열을 따져서 단정론의 정당성 주장하는 것은 결과론적 접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의 단정론은 냉전 상황에 대한 고려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념의 비인도성과 비효율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도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3. 이승만 권위주의 정치와 50년대의 역동성과 후반부의 퇴행

통합의 역사인식의 또 하나의 주제는 이승만 집권기의 이해 및 평가와 관련된 것이다. 12년간 지속된 이승만 집권기는 시기에 따른 진폭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일인 중심 권위주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 가장 돌출된 표현은 1952년, 1954년 두 차례에 걸친 이승만의 계속 집권을 위한 폭력과 불법에 의존하는 헌법 개정이다. 또 이승만과 관료, 경찰, 군, 자유당, 그 외 추종자들과의 관계는 근대적 계약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전 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것에 가까웠다.
 
통치 후반부에 들어서며 선거과정에 대한 관官과 경찰, 심지어 일반 폭력집단까지 동원된 조작적 간섭이 눈에 띠게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이승만 정부가 민주주의 정립을 주장하는 학생봉기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치의 권위주의적 속성을 웅변한다. 이러한 실상에 비추어 민주운동 사관은 이승만 시기를 발전이 저해된 부정적 시기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통합의 역사인식은 50년대에 내재된 역동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즉 후반에 접어들면서 권력의 퇴행현상이 발생하지만 50년대는 성숙한 근대 국민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결정적 기초가 놓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이승만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초기의 극심한 혼란을 극복하고 안보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여 국민적 정체성을 지닌 사회로 대한민국을 정착시켰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건국 후에도 대한민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서 최소한의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안보체제의 미흡함이 그 하나이다. 건국 직후 대한민국은 각계각층에 뿌리를 내린 좌익으로부터의 정치적․사상적 도전은 물론 일부 지역에 자리 잡은 친북 게릴라의 폭력적 도전에까지 직면하고 있었다. 뒤이은 북한의 6․25 도발로 생존 자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이후 북한과의 생사를 건 대결상황은 국정운영의 기조를 결정하는 중심적 요인이 되고 안보체제의 확립을 최우선 국가과제로 자리잡게 한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위해 전 방위적 노력을 경주하는데, 가장 중요한 성과는 미국의 협조를 유도하여 역사상 가장 강력한 70만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보체제는 단순한 군사력의 신장을 넘어서는 복합적 구성체이다. 즉 70만 대군의 확보 외에 좌익의 철저한 검색을 가능하게 한 반공법의 제정, 세계 최강의 미국과 동맹관계를 제도화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그밖에 이념교육의 강화를 통한 반공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의 확보 등이 포함 된다.

안보체제의 기반 확립과 함께 이승만 정부는 국민적 정체성의 배양을 통해 대한민국을 정체성 있는 정치공동체로 확립시킨다. 해방과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서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조선인과 구별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적지 않은 혼란을 경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북한으로부터의 부단한 이념적․정치적 공세는 정체성 혼란을 야기한 다른 요인이다. 이런 상황에 맞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국민적 정체성을 습득하게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근대국가로 자리 잡는 기본조건의 하나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안보체제의 기반을 놓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부는 교육혁명으로 불릴 정도로 대대적으로 교육기관을 확충하였고, 반공과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공민교육을 통해 북한과 확연이 구분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지시킨다.
 
6․25 경험은 이 교육의 효율성을 높인 주요 요인이 되었다. 덧붙여 농지개혁은 국민의 절대다수였던 농민을 소작농에서 경작지를 소유한 소농으로 변신시켜 대한민국에 소속감 지니는 국민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였다. 가장 걸출한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강화하여 국민적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다.

표면에 드러나는 권위주의 정치질서에도 불구하고 안보체제와 국민적 정체성의 확립 과정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성숙과 발전에 불가결한 기반이 놓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단순한 안보적 의미만이 아니고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문명권으로 편입되고 민주주의적 가치와 실천을 촉진하는 강한 외부적 압력에 항시적, 그리고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위치에 놓이게 한다.
 
동시에 교육기관의 대량 확충에 의한 교육인구의 팽창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놓고, 민주화 운동의 주인공이 되는 학생집단을 양성하는 결과를 동반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승만 정부는 시대적 적실성을 상실해가고 민주화운동 세력이 새 시대를 여는 역할을 떠안게 된다.

1954년 11월 말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을 통해 이뤄진 이승만의 계속 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은 이승만 통치권력의 정당성에 커다란 상처를 준 사건이었고, 이후 민심이반은 가속화된다. 무엇보다 무리한 사사오입 개헌은 민주당이라는 통합야당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어 자유당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의 구심점을 형성하게 된다.
 
1956년 대선에서 야당인 민주당후보가 부통령으로 당선되고 1958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비록 원내 제1당을 유지하였으나, 민주당은 도시부에서 압승을 거두고 출범 당시보다 두 배가 넘는 의석을 확보한다. 이승만정부의 정치적 위기 상황은 1950년대 후반, 특히 미 원조의 급속한 축소가 야기한 경제침체 현상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50년대 후반 고령의 이승만을 대신하여 상당부분 국정운영의 대리인으로 자리잡게 되는 경무대의 비서진과 자유당 지도부는 위기국면을 국정쇄신의 계기로 삼는 대신 억압적 방법 강화의 기회로 삼는다.
 
예를 들어 1958년 12월, 비판적 언론에 대한 통제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보안법개정안을 경호권의 발동 아래 강압적으로 통과시킨다. 동시에 지방자치단체장을 중앙정부가 임명하도록 하는 개정안도 통과된다. 1959년 4월에는 경향신문이 기사가 문제가 되어 폐간되고 대야 강경파 인사들이 선거 관련부처 장관으로 임명된다. 이승만 후기 권력체제의 시대 역행성은 마지막까지 이승만의 직접 관할하에 있던 외교영역 등에서도 나타난다.
 
즉 그는 끝까지 한일회담에 경직된 태도로 임했고 새로운 화두로 회자되기 시작한 경제장기계획 도입에 부정적 자세를 견지한다. 장기집권 권력이 경직화되어 다양한 수준에서 시대적 적실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15대선 결과의 전면 조작이라는 극단적 방법에 의존하여 계속 집권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는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부의 붕괴로 이어지는 학생들의 유혈봉기를 야기한다.
 
주목할 것은 4․19를 주도한 직접적 힘은 학생세력으로부터 나왔고, 동시에 자유당 정부에 대한 투쟁을 통해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한 민주당의 활동이 봉기의 배후에서 작용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통합의 역사인식이 민주화 대항 세력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동시에 통합의 역사인식은 이승만 정부는 권위주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건국헌법의 기본정신에 따라 경쟁적 의회제도와 주기적 선거의 유지를 통해 민주화 대항세력의 활동 공간을 보장하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중>으로 계속 [김세중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0/04/02 [09:11]  최종편집: ⓒ 환타임스
 
물같이 바람같이
강현무의 우리문화 X파일
권영준의 인체삼육도 원리
권영준의 하늘말·하늘글·하늘법
김규순의 풍수보따리
김용성의 태극한글
김종호의 홍익글로벌 敍事
김주호의 얼 말 글
노중평의 우리 별 이야기
박민찬의 도선 풍수
박상근의 웰빙 풍수
박용규의 주역원리 탐구
반재원의 우리 희망 토종약초
서상욱의 주역 산책
성미경의 하늘그림궁
소윤하의 穴針뽑기 대장정
이공훈의 道敎탐색
이용범의 한국陶瓷 탐험
이훈섭의 단군제영한시 되보기
정진중의 씨알 교육
조성제의 무교 生生之生
조옥구의 한민족과 漢字 비밀
조옥구의 한자 실전인문학
최근 기사 클릭 베스트5
  환타임스 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제휴문의기사제보개인정보취급방침오시는 길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93 대은B/D 5층 ㅣ 대표전화 : 02-733-8024 ㅣ 팩스 : 02-733-8025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00922 ㅣ 등록일자 : 2009년 7월30일ㅣ 발행인 : 김인배 ㅣ 편집인 : 김영인 ㅣ 청소년보호책임자 : 호승택
Copyright ⓒ 2009 환타임스. All rights reserved.
Contact news@whantimes.com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