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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 재출간 30년 `환단고기` 재조명
'기자'를 통해 본 '환단고기'역사성
<특별연재>'환단고기 재조명' 학술대회 <16>
박병훈 함열고등학교 교사 '한단고기의 역사적 전승 과정'(하)
 
박병훈
4.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환단고기』의 역사성 검토

4.1 상이한 단군과 기자 기록들을 통한 삼한, 삼조선, 대부여의 입증

가. 『한서』-『후한서』-『삼국지』의 선택 : '40여대 후 준왕'의 의미 = '번조선의 44대 후 준왕'을 "기자의 40여대 후 준왕"으로 변형(번한세가의 존재 증명)

지나사에 기록된 소위 '기자조선설'의 변천과정에는 중요한 사실이 숨겨져 있다. 그 변천과정을 살펴보면서 추적해 보겠다.

1) 진 이전 서적의 '기자' 항목 : 『죽서기년』 『상서』 『한시외전』 『논어』 『좌전』은 기자에 대한 언급에서 기자조선설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2) 진 이후 서적 : 『사기』의 '진번조선''예맥조선'은 국명으로 보면 진막번조선, 족명으로 보면 한맥예조선의 삼조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해석은 신채호의 해석이다.
 
이 입장에서는 『사기』 '조선전'의 이후 오독만이 문제이다. 『상서대전』, 『사기』는 "기자가 조선의 왕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기색은』, 『수경주』, 『대청일청지』는 각각 다른 황하 유역의 기자묘를 전하고 있다.
 
『사기집해』는 기자의 명이 서여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이 모두 진실이라면, 기자는 여럿이고 지나 지역에 존재하였다. 윤내현은 이런 관점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3) 한 이후의 서적 : 『한서』 『후한서』 『삼국지』는 『상서대전』, 『사기』의 '기자'와 번조선의 30대 서우여를 동일시하고 있다. 『한서』는 『사기』의 "기자조선설"과 『사기집해』에서 사마표가 주장한 기자 이름이 서여(胥餘)라는 것에 유도되어 '기자'를 번조선 30대 서우여(徐于餘)와 동일시하고 있다. 『한서』의 "8조금법", 『후한서』 『삼국지』의 "기자의 40여대 후손 기준왕"은 당시 『환단고기』와 같은 기록의 존재를 보여준다.
 
『후한서』 『삼국지』의 예 항목에만 "예"조선-기자의 후예, 기준왕-위만조선-4사군의 계보가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설 식 해석은 『후한서』 『삼국지』의 기록에 대한 수양제 때 배구(裵矩)가 고구려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발한 오독의 산물이었다. 『환단고기』의 삼조선 설만 이 오독과 불일치한다.

 

 사료10, 『한서』 "동이전": 1.'은나라 도가 쇠하므로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와 농사 짓고 누에치는 것과 베짜는 것을 가르쳤다. 낙랑과 조선 백성에게 금하는 법8조목을 만들었다. 2.한서 지리지 (낙랑군편) 조선 응소가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했다.

사료11, 『후한서』 "동이전": 1.옛날 기자가 조선에 가서 여덟가지 조목의 가르침을 만들어 가르쳤다. 2.그 뒤에 40여대를 지나 조선후 준이 참람되히 왕이라 일컫자 진승등이 일어나서 온 천하가 모두 진나라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동이전 예 항목)


사료12, 『삼국지』 "위지동이전": 1.예와 옥저와 고려는 본래 조선 땅이다. 옛날 기자가 그들에게 예의와 농사 짓는 것과 누에 치는 법을 가르치고 또 8조의 교훈을 가르쳤다. 2.그 뒤에 40여 대를 지나서 조선후 준 때에 이르러 자칭 왕이라고 했다. (동이전 예 항목)

사료13, 『환단고기』 「태백일사」: 8조금법: -고조선의 8조금법은 태백일사에서 번조선의 30대 서우여에 의하여 제정된다. 2. 40여대후 조선왕 준(45 대) 산정시점은 고조선의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국명개칭 시기이다.



나.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에서의 단군과 기자

『환단고기』 내용이 『한서』, 『후한서』, 『삼국지』처럼 처음에 애매해지고 이어 배구(裵矩)가 의도적으로 오독하자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기록은 전승 자료와 한 사서와의 불일치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들이다.

나-1. 『삼국유사』의 단군수명 '1908년간'과 단군재위 '1500년간'의 의미

삼한, 삼조선 시대가 1908년간이고, 단군왕검의 초기 칭호 사용에서 삼한까지 1500년간이다.

사료14, 『삼국유사』의 단군신화(기이편1: 고조선): 어국일천오백년(御國一千五百年) 주호왕즉위기묘(周虎王卽位己卯)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단군내이어장당경(檀君乃移於藏唐京) 후환은어아사달위산신(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수일천구백팔세(壽一千九百八歲): 나라를 다스린지 1천 5백년만에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 1천9백8세 였다고 한다. 



1) 『삼국유사』 기록과 『환단고기』 기록을 정합시켜서 역사를 해석해 보겠다. 『삼국유사』는 단군재위 1500년간과 단군수명 1908년간이라는 주장을 한다. 『환단고기』에서 단군왕검과 신인 단군왕검은 구별된다.

단군왕검은 최초로 B.C.2622년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자오지 환웅 시절이다.
 
동 시대에는 고신과 대효가 있다. 단국 왕검은 '고'(=고신)와 동시에 개국한다. 단국 어국 1500년간은 자오지 환웅시절의 단군왕검 봉국(封國) B.C. 2622년에서 은 멸망 B.C. 1122년 이전까지로 계산(2622-1122=1500)해서 1500년간이다.

2) 신인 단군왕검은 삼한 관경을 통일해서 B.C.2333년에 개국한다. 동 시대에는 요가 있었다. 단군 왕검은 '고'(=요)와 동시에 개국한다. 단군 수명 1908년간은 실은 단군들이 등극해서 대부여로 국명 개칭(B.C.1285년)을 하기까지이다.
 
단군 수명 1908년은 실은 단군 어국 1908년간으로 개국 B.C.2333년에서 대부여로 국명 개칭한 B.C.1285년을 빼면(2333-1285=1908) 1908년간이다.

3) 『삼국유사』는 기이편1의 표제목으로 볼 때에 '고조선(=단군 조선) 시대-위만조선시대'만 설정한다. 기자조선이라는 항목은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한서』-『후한서』-『삼국지』의 "기자조선설"에 따라 '고조선(=단군조선) 항목에 기자조선’을 병행해서 첨가한다. 이것이 『제왕운기』를 자극한다.

나-2. 『제왕운기』의 '공백기 164년간'의 의미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국명 개칭과 은 멸망 사이의 공백기 164년간은 '기자의 40여대 후 준왕'을 '기자의 41대 후손 기준왕'으로 수정한 결과이다.


 사료15 『제왕운기』의 조선편: 제고와 동시에 무진년( B.C. 2333년)에 일어나서..... 나라를 누리기 1천2십8년..... 이 뒤 1백6십4년 만에..... 후 조선의 시조는 기자(箕子)..... 41대손의 이름은 준(準)..... 9백 2십 8년을 다스렸다.

주(註) 본기왈(本紀曰)......이름은 단군이고, 1038년을 다스리고,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다.


1) 『제왕운기』는 『한서』-『후한서』-『삼국지』의 '기자조선설(은 멸망 B.C.1122년)'과 '기자의 40여대 후 기준왕(B.C.221~B.C.194)설'을 따르면서, 『환단고기』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에 입각해서 해석해보면 번한(B.C.2333~B.C.1286)에서 번조선(B.C.1285~B.C.194)으로의 국명 개칭 이후의 역대 왕대수와 45대와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동시에 『한서』, 『후한서』, 『삼국지』가 기자로 추정한 번조선 30대 서우여(B.C.1285~B.C.1225)와 은 멸망 시점(B.C. 1122년)이 연대 상 부정합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제왕운기』는 『한서』-『후한서』-『삼국지』가 기자를 추정할 때에 지나 측 사서의 "주 무왕이 은 멸망 시(B.C.1122년)에 기자를 조선왕에게 봉했다"는 내용을 『환단고기』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에 입각해서 해석해 보면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을 보고 기준의 선조로서 기자를 추정하였다는 점을 알아 차렸다. 『제왕운기』는 은나라 멸망시기와 동 시대의 (번)조선왕을 추적하였다.

『제왕운기』는 기자조선의 시점을 은 멸망 시인 B.C.1122년으로 보고 기준의 멸망 시점을 B.C.194년으로 보아 기자조선 928년(1122-194 = 928) 간을 확정하였다. 『제왕운기』의 '기자의 41대 후손 기준'은 『환단고기』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에 입각해서 해석해보면 은 멸망 시(B.C.1122년)에 번조선의 번왕을 추적하고 기자를 “번조선 33대 임나(B.C. 1137~B.C.1106)”로 상정해서 계산한 결과이다

『제왕운기』는 삼한에서 삼조선으로의 국명 개칭 시점 전해인 B.C. 1286년과 은 멸망 시점(=기자동래설 시점) B.C.1122년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파악하고 괴리기간 164년 간(1286-1122=164)의 공백기를 두었다.
 
『제왕운기』가 설정한 공백기 164년간은 『환단고기』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에 따라 해석해보면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국명 개칭(B.C.1285년) 사실과 『한서』, 『후한서』, 『삼국지』가 은 멸망 시(B.C.1122년)로 상정한 '기자조선설'의 파급효과, 그리고 양자 사이의 시간적인 괴리시간 164년간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제왕운기』의 공백기 164년간은 『환단고기』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기록이 없으면 해석이 불가능하다. 『제왕운기』의 공백기 164년은 우연한 숫자가 아니고 그것이 『환단고기』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기록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2) 단군재위는 본문의 1028년간도 주의 1038년간도 납득할 수 없는 기간이다. 이 설의 출처는 해석할 수 없다. 이 불일치가 『응제시주』를 자극한다.

나-3. 『응제시주』의 단군수명 ‘1048년’의 의미 : 『제왕운기』의 교정(삼한 시대 1048년 간)


사료16.『응제시주(應制詩註)』권람(權擥)(1462), 응제시주(應制詩註) 명제십수(命題十首)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자주(自註) 석신인강단목하(昔神人降檀木下) 국인입이위왕(國人立以爲王) 인호단군(人號檀君) 시당요원년무진야(時唐堯元年戊辰也) [증주(增註)] 고기운(古記云) ......잉생자왈(孕生子曰) 단군(檀君) 여당요동일이입(與唐堯同日而立) 국호조선(國號朝鮮) ......향년일천사십팔년(享年一千四十八年) 궐후일백육십사년기묘(厥後一百六十四年己卯) 기자내봉(箕子來封)]..... 전세부지기(傳世不知幾) 역년증과천(歷年曾過千) 후래기자대(後來箕子代) 동시호조선(同是號朝鮮) 


1) 『응제시주』는 "단군 향년이 1048년이고, 그 후 164년 후에 기자가 봉해져서 왔다."고 한다. 『응제시주』 기록은 『제왕운기』 기록에 의존하면서 부분적인 교정을 가한 것이다.
 
『응제시주』는 『제왕운기』의 단군역년 1028년(주의 경우에 혹은 1038년)을 단군 향년 1048년으로 교정하고, 『제왕운기』의 164년간의 공백기는 그대로 수용해서 역시 그 후에 164년 후에 기자가 봉해져 왔다고 말한다.

2) 『응제시주』의 단군수명 1048년 간은 『환단고기』로 볼 때에 삼한 개국 B.C.2333년에서 삼조선 국명개칭 B.C.1285년을 뺀 삼한시대 1048년(2333-1285=1048) 간과 일치한다. (아마 B.C.2333년은 『삼국유사』에서, B.C.1285년은 『제왕운기』에서 파악해서 정리한 것일 것이다.)
 
『응제시주』의 그 후 164년간은 『제왕운기』와 마찬가지로 국명개칭(B.C.1285년) 전해(B.C.1286년)에서 은 멸망(B.C.1122년) 사이의 간격이다. 『응제시주』는 기자조선의 원년이 B.C.1122년이고, 기자의 41대 후손 기준왕은 생략되었지만 『응제시주』의 기자조선 역년은 『제왕운기』처럼 기자원년(B.C.1122년)에서 위만원년(B.C.194년)을 빼서 계산한 928년간(1122-194=928)으로 같다.

다. 『규원사화』, 『단기고사』에서의 단군과 기자

『규원사화』와 『단기고사』는 『환단고기』를 발견한 사람들이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와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환단고기』 기록을 변형해서 등장한 사서들이다.


다-1. 『규원사화』의 단군조선시대 '1195년간'의 의미

『제왕운기』가 기자로 추정한 임나 원년 1137년과 공백기 1년 추가, 『진역류기』(=단군세기) 내용에 대한 압축변형이다.

1) 『규원사화』의 단군조선 1195년간은 『환단고기』에 입각해 해석해 보면, 단군 개국 B.C.2333년에서 『제왕운기』의 "41대 후손 기준"을 역순해서 조사하고, 동시에 은 멸망 시점 B.C.1122년에 해당하는 번조선의 왕을 조사해서, 선정한 임나의 원년 B.C.1137년을 빼고 계산한 결과인 1196년간(2333-1137=1196)에서 공백기 1년을 설정하여 계산 하면 1195년간(1196-1=1195)이 나온다.

2) 『규원사화』는 단군조선 시대가 왜 1196년간이 아니고 1195년간아라고 설정했을까? 『규원사화』는 『제왕운기』의 영향으로 수정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백기 1년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규원사화』는 단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발표하면 '기자조선설'의 영향으로 아예 통채로 사장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해서 약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2. 『단기고사(檀奇古史)』의 기자(奇子)조선과 전·휴 단조(前· 後檀祖) 사이의 구분

『단기고사』의 전·후단조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진한-진조선-대부여와 거의 일치하고, 『단기고사』의 기자조선(奇子朝鮮)은 기씨 일족 부분이 빠진 것 등만 제외하면 『환단고기』<태백일사> ‘번조선계’와 대부분 일치한다. 『환단고기』가 원본이고, 『단기고사』는 그것을 변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단군기원 B.C.2333 + 124년이고, 은 멸망 B.C.1122+124년, 위만 B.C.194년

기자조선 건국(B.C.1122년+124년) 후에 후단조 시작 : 전단조와 후단조


1) 『한서』-『후한서』-『삼국지』의 기자조선설의 영향

* 연대 산정의 준거 : 기자조선 1122(은 멸망) +124(소강절 축소분), 『단기고사』는 전단조(前檀朝) 1214년간, 후단조(後檀朝) 875년간 합계 2099년간을 주장하고, 기자조선(奇子朝鮮) 1052년간을 주장한다.

(1) 기자조선의 역년 1052년간
 
사료17, "제1세 기자부터 제42세 기자까지 역년 1052년이다." 


『단기고사』의 기자조선 역년 1052년간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환단고기』에 입각해서 해석하면 그 의미가 드러난다. 『단기고사』는 기자조선 원년인 B.C.1122년을 소강절이 연대 축소했다는 124년을 추가해서 B.C.1246년(1122+124=1246)으로 수정하고, 기준왕이 망한 시점인 194년은 수정 없이 유지하면 기자조선은 1246-194=1052해서 1052년간이 나온다.


(2) 후단조 역년 875년간

『단기고사』의 후단조 역년은 875년간이다. 『단기고사』에 따라 계산하면 기자조선 건국 시점 1122년에서 47대 고열가 멸망 시점 238년을 빼면 1122-237=885로 역년 885년간이 나와서 10년 차이가 나고 있다.
 
『단기고사』의 후단조 875년간은 『환단고기』로 해석해 보면 솔나 39년 1112년 - 고열가 58년 238년 직후년도 237년 = 875년간이다. 솔나 39년은 『환단고기』에서는 B.C.1112년이지만 『단기고사』에서는 B.C. 246년(=1122+124년)이다.
 
그런데 『단기고사』의 후단조 역년 875년과 정합하는 것은 솔라 39년을 『단기고사』의 년도(1122년+124)가 아니라 『환단고기』의 년도(1112년)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다시 해모수의 등장시기(237년)와 부합해야 한다. 따라서 『단기고사』가 설정한 후단조 875년간은 『환단고기』를 저본으로 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년도이다.

(3) 『단기고사』 년도 기록 : 전단조 1214년간

『단기고사』의 전단조 1214년간은 내적으로 불일치하는 기록들이다.

 
 사료18,제1편 전단조선 마지막 부분: "제25세 단제(第二十五世 檀帝) <이름은 솔라(率那)이며 39년간 재위하셨다>...... 39년에 단제께서 길림(吉林)에서 영고탑에 이도(移都)하셨다. 전단조(前檀祖) 제1세 단제로부터 25세단제 솔나 재위 39년까지 무릇 25대 역년(歷年)이 1214년이다."

사료19, 제2편 후단조선 처음 부분: "제2편 후단조선, 후단조 1세 단제, 후단조 제1세 단제 솔나는 전단조 제23세 단제 아홀의 둘째 아들이시고, 제24세 연나의 동생이시다. 단군기원 1240년 7월 15일에 영고탑에 천도하셨다."

사료20, 제3편 기자조선 처음 부분, "기자의 성은 환씨이며 이름은 서여이다. ......전단조 25세 39년에 보위에 오르시고, 평양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시고, 국호를 조선이라 명명하셨다......"


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후단 조선과 기자 조선이 상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영고탑으로 이도한 시기는 ‘단군기원 1240년’과 ‘전단조 역년 1214년간’의 숫자가 일치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일치한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가 동종의 기록에서 출발했다면, 기자조선의 평양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개평 평양(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이다.

2) 『삼국유사』의 기자조선설의 영향 : 수도의 이전

(1) 『단기고사』가 전단조와 후단조를 나누는 준거로 왜 수도 이전을 선택하였는가?

『단기고사』가 수도이전으로 전단조와 후단조를 나눈 이유는 『삼국유사』의 장당경으로의 수도 이전의 영향이다.
 
사료21, 『삼국유사』 권1 고조선: 나라를 다스린지 1천 5백년만에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 1천9백8세 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고대사 인식은 단군조선(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병존) - 위만조선의 체계이다. 『단기고사』는 『삼국유사』를 추종해서 단군조선,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병존 체계를 구성하였다. 『단기고사』가 전단조 25세 단제 솔나 마지막에 영고탑으로 수도 이전을 기록하고 전단조의 마지막으로 설정하게 만든 근거는 『삼국유사』이다. 이도한 수도 명칭은 다르지만 사실상 동일한 착상이 작용하고 있다.

(2) 수도 이전 시기의 불일치

『단기고사』는 전단조와 후단조의 분할에 준거하여 전단조는 말기에 영고탑으로 수도 이전한 것으로 끝맺고 있다. 전단조의 마지막 단제는 제25대 단제 솔나이다.

사료22, "제25세 단제(第二十五世 檀帝) ...... 39년에 단제께서 길림(吉林)에서 영고탑에 이도(移都)하셨다. 전단조(前檀祖) 제1세 단제로부터 25세단제 솔나 재위 39년까지 무릇 25대 역년(歷年)이 1214년이다."

사료23, "제 2편 후단조선, 후단조 1세 단제, 후단조 제1세 단제 솔나는 ...... 단군기원 1240년 7월 15일에 영고탑에 천도하셨다."
 


5. 결론

『환단고기』기록은 대부분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연결고리인 경우가 많다.『환단고기』는 이제까지의 연구로 보아 진서이거나 적어도 근대의 천재적인 역사가의 작품이다.
 
환단삼서의 현존 판본들이라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환단고기』에 대한 지지자의 연구뿐 아니라 비판자(조인성, 초록불의 잡학다식 등)의 연구에도 감사한다.
 
비판이 무시보다 훨씬 낫다. 국가(와 한국연구재단)가 인문학특허제도를 만들어 주면 『환단고기』문제와 별도로 고조선이 초강대국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박병훈 함열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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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3/25 [08:47]  최종편집: ⓒ 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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