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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일뿐... 사라지는 안도감을...
현정수의 수행소설 '파라가테'<27>
"모든 무명을 밝혀줄 광명의 세계, 그 세계가 바로 피안인 것"
 
현정수

나는 다음날 정오가 넘어서야 다시 별장으로 내려올 수 있었고 염려와는 다르게 덕구는 무탈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교수님 유고전 일로 서울을 오르락 거리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서울 집에서 잠시 거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산간의 내 거처보다는 비어있는 그의 집을 무단으로 방치해 놓을 수가 없었던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으리라.

 

그는 내게 모든 걸 섬기라고 했고 또 모든 걸 그대로 두라고 했다. 나는 바쁘게 오가는 가운데서도 그의 말을 침묵 가운데 깊이 묵상했다. 가능한 한 명상의 시간을 늘렸으며 더불어 마음의 집착을 몰아내고 나를 이완시키는데 많은 힘을 쏟았지만 나의 온 정신은 오로지 그에게 빼앗긴 채 마치 서서히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가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고모님 댁에 머물게 되는 날도 있었고 잠시 들러서 내려오게 되는 날도 있었으나 그럴 때에도 나의 신 성허는 창가에 선 채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때로는 명상 중일 때에도 감은 눈을 결코 뜨지 않았다. 그대로 수십 분간 그를 바라다보다가 돌아 나와야만 하는 내 마음은 늘 무너지는 듯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즈음 기선의 열정은 갈급한 그의 마음을 담은 채 내 사서함을 메워갔다. 나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의 내면의 분노들과 결합하여 더욱 크나큰 격정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내 눈에는 극히 위험하게 보이는 것이었으나 어차피 그의 내면에서 몇 바탕은 싸우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었다. 나는 그저 염려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내가 성허에게 갖고 있는 충족될 수 없는 애정의 갈급함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쌓여있는 분노는 깊었고 내 마음 속에는 사랑이 깊었다. 아울러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위험성은 현재로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러던 한 주말에 그가 별장으로 내려왔다. 

 

「금파, 나는 괴로워, 괴로워, 정말 무한히도 괴롭다오...」

 

내 앞에 무릎을 꿇어 두 팔로 허리를 그러안은 채 토해내는 그것은 절규에 가까웠다. 나는 성허에 대한 내 괴로움의 깊이로 그를 이해했다. 다방면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높이만큼 그것은 분노로 드러날 것이고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한과 결탁하여 마구잡이로 대상을 찾을 것이었다. 정말 위험한 노릇이었다.

 

「오오... 금파! 내 안에 내 아버지의 살의가 있어요. 나는 무서워... 어쩌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크나큰 일을 저지르고 말 것만 같소. 이 거대한 힘이 무엇이오? 나를 덮치는 이 검은 그림자가 무엇이란 말이오? 아아... 내게로 전승된 내 아버지의 잔인성이 이 속에 그리도 깊이 잠재해 있을 줄이야... 아아, 나는 몰랐어. 정말 몰랐다오.」

 

나는 무릎을 꿇어 그의 두 팔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기선씨.」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진땀이 배어 보이는 그의 이마 위로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마구 분산되어 어지러운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그 살의가 드러나던 마음 이전의 마음 상태로 가보세요.」

 

잠시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흔들리던 그가 입을 무겁게 뗐다. 

 

「아아... 그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참히 죽였다는 연상이었소.」 

 

「그 바로 전에는요?」

 

「그 바로 전에는... 전에는...」 

 

「네, 그 전에는요?」 

 

「그 전에는 심각한 욕정이었소. 아아... 명상에만 들면 욕정이 끓어올라요. 나는 그것이 무척 화가 난다오. 아무래도 나는 짐승만도 못한 놈인 것 같소. 아아... 금파 나를 이런 식으로 취조하지 말아요. 나는 수치스러워.」

 

「기선씨, 명상은 때때로 성욕을 크게 일으키기도 하는 거예요. 그것도 겪고 지나가는 한 과정이에요. 그것은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했고 이 땅에 인류를 유지하게 하는 커다란 힘이잖아요. 그러나 그 힘은 정돈되어야 할 뿐 아니라 질서를 잡을 필요가 있는 큰 힘이지요.」

 

「하지만 금파, 당신을 통해 이룰 수 없는 나의 세속적 욕망은 나를 말할 수 없이 교란시켜요. 나는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그 이전의 마음 상태는 어땠었나요? 욕정이 끓어오르기 전의 마음 상태는요?」

 

「아아... 정말 부끄럽소만 욕정은 명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나를 지배하는 마음이었고, 항상 나의 머릿속에는 금파, 당신만이 가득하다오. 당신에 대한 기억, 당신에 대한 그리움, 당신에 대한 소망, 그리고 당신과 관련하는 나만의 숱한 상상들... 아아, 그러나 그러한 내 딴엔 아름다운 그 모든 연상들은 무지한 힘으로 기본적 나의 성욕과 힘을 합하여 결국은 아버지에 관한 기억으로 귀착되고 살벌한 원한으로 변하고 만다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살의가 내 측근의 마땅치 않은 사람에게 체계적으로 겨냥된다는 점이오. 나는 나의 명상을 통하여 내가 누구를 싫어하고 누구를 부담스러워 하는가까지도 명확히 읽어낼 수 있었어. 나의 그러한 살의가 만들어내는 가공할 시나리오에 실제로 누군가가 희생될까봐 정말 겁이 난다오. 오오... 금파, 나는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만일 그 살의가 일어나기 직전의 고압적 성욕이 지배하는 그 시점, 만일 그 시점에 여자가 바로 옆에 있다면 어찌될 것 같나요?」

 

그가 불안한 눈길로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일이요만 아마도 그런 때에 강간이라는 걸 하게 되는 걸 거요. 아아... 금파 더 이상 묻지 말아요.」

 

「아니요 기선씨,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심도 있게 더 자주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내 마음과 몸이 무엇으로 형성돼 있고 마음은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면밀히 파악해야 해요. 그래야 그 막무가내의 힘들을 지배할 수가 있게 되니까요. 지배라는 건 다름이 아니라 공존이고 인도(引導)예요.」

 

「공존? 인도?」

 

「우리가 어떤 내부적인 힘을 억지로 막거나 소멸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최소한 그것이 날뛰고 있는 것을 주시하면서 어떤 경로로 움직여 가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어요. 공존이나 인도라는 것은 내부에 있는 에너지들을 그대로 바라다본다든가 아니면 다른 에너지로 전환시킨다는 것인데, 두 가지가 모두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마음 상태와, 머리를 장악하고 있는 생각들을 매순간 각성할 수만 있다면, 그 욕정이라든가 분노라든가 잔인성이라는 것들은 결국은 왔다가 사라져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아무리 커도 결국은 사라지게 돼 있어요. 그렇다면, 사라져갈 것들이라면, 그것들에게 지배받아 자신이 침몰되는 일이 생겨나선 안 되죠. 보세요. 지금 당신은 그때 그 상황을 회상해서 내게 얘기했지만 그때와 같은 잔인성을 가지고 그것을 기억하지는 않았어요. 특정인에게 살의를 가지게 된다는 것과 그 이전의 마음은 욕정이었다는 것, 그 더 전에는 단순한 기억과 연상들이었다는 것... 거기서 우리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란 불안감을 증폭시켜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파악해야 해요. 마음의 작용이란 말할 수 없이 교활한 것이어서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타당한 꼬투리를 이끌어내고 말지요. 그 마음은 아버지를 향한 원한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타당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타당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마음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일 뿐이죠. 그렇게 마음작용이란 실로 간파하기 힘들 정도로 기묘한 것이라서 반박조차 하기 어려운 가공할 논리로 정당성을 입증해가면서 당신을 절묘하게 속이고 있답니다. 거기에 휘둘려서는 안돼요. 그 마음의 생리를 간파할 때까지 내면 바라다보기를 멈추어선 안된다구요. 하지만 그 폭발적 에너지가 너무도 거세서 조절할 수가 없을 때에는 인위적으로라도 욕정을 푸세요. 그리고 그 다음을 또 관찰해보세요.」

 

「인위적으로?」 

 

「네. 인위적으로... 알아들으시죠?」 

 

「금파...」 

 

「네.」 

 

극도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렇게 해본 적도 있어요.」 

 

「그랬더니요?」

 

「모든 게 시들해졌어요. 나는 그것이 싫었어요. 욕정을 못 이겨 자위를 한다든가 그 이후 모든 게 시들해지더라는 나의 속성 자체가 너무나도 싫었어요. 그토록 막강하여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혈압이 치솟아 오르고 아무개를 어떻게 해치우겠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나를 주체할 수 없었던 내가 사정 한번으로 시들한 상태로 간다는 것이 얼빠진 짐승 같다는 비판적 느낌이 들었어요.」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것 보세요. 욕망의 에너지가 거세졌다가 분노의 에너지로 전환을 하고, 분노의 에너지가 극에 달했다 해도 그것을 발산시켰더니 고여 있던 에너지가 일체 사라지게 됐어요.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이죠. 다시 또 내부에선 그런 순환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말아요. 정말 교묘한 마음작용이지요. 이 반복, 그것은 멈춰져야 할 반복이죠. 언제까지나 반복만 할 순 없으니까요. 아무튼 당신이 얼빠진 짐승이어서가 아니었던 건 분명하죠? 그 모든 내적 상태의 변화란 단지 불안과 안도의 상태를 진자처럼 오락가락하고 있는 마음의 생리작용일 뿐인 것이죠.」

 

그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됐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안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배가 고프다든가... 반대로 지나치게 배가 부르다는 것도 몸을 불안하게 만들잖아요. 뿐만 아니라 극도로 가난하다든가 극도로 부자라든가, 극도로 피곤하다든가 너무나도 할일이 없다든가... 무엇이든 극에 치우치면 불안해져요. 마음이나 신체나 중화를 이룰 때가 가장 안정성이 있는데 마음의 중도라는 것은 그렇게 얻어내기가 쉬운 게 아니죠. 그걸 평상심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득도의 경지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작은 안도감을 맛볼 수는 있어요. 그리고 그 안도감에 관한 기억들은 다시 또 그것을 추구하게 만들고 더불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되지요. 흔히 그 안도감에서 행복을 느끼게도 되는데 잘 관찰해보면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안도감을 추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요. 성적인 부분도 강렬한 쾌감에 대한 기억이 사람을 충동하게 하는 건지, 쾌감 이후에 찾아온 안도감이 사람을 그쪽으로 움직이게끔 만드는 건지는 상당히 세밀하게 살펴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죠. 그 또한 죽음에 관한 잠재적 기억에서 비롯되는 감각일 텐데...」

 

「죽음에서?」 

 

「네. 어떤 행위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전적인 무위의 안도감, 죽어보니 ‘그토록 공포스럽고 불안했던 죽음이라는 것이 이토록도 편안하구나.’ 라는 그 잠재적 기억이요. 또한 ‘죽었는데 알고 보니 죽은 게 아니었네.’ 라는 그 잠재적 기억, 그건 잠재의식계로부터 막연한 감각으로나 올라오게 되는 거지만 분명 그건 안도감이지요. 숨이 끊어진다는 것은 신체에서 그 모든 생체 에너지가 철저하게 방출되는 큰 죽음이고 사정이란 생체 에너지가 부분적으로 방출되는 작은 죽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은 몸이라는 그릇의 주체인 우리의 의식체에 새겨져 잠재의식으로 유지되는 것이지요. 의식체 이것은, 우리의 몸이 죽는다 해도 결코 죽지 않고 우리를 윤회로 이끈다고 하죠.」

 

「작은 죽음?」 

 

「네, 사정이란 ‘욕망’이라는 ‘마음의 죽음’임과 동시에 몸 안에 고여 있던 생명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빠져나가는 ‘육체의 부분적 죽음’인 거라구요. 그러한 작은 죽음 또한 안도감을 일으키는 거예요. ‘아! 이젠 됐다...’ 라는 느낌. 에너지가 밖으로 빠져나갈 때 사람들은 희열을 느끼게 되지요. 그때 비로소 사람은 욕망이라는 탐심에서 해방되어 잠시 무구해질 수 있어요. 욕망을 비우면 사람은 순수해지고 무구해져요. 절대적 포기가 사람을 안도상태로 이끄는 것처럼. 이것은 계속해서 순환되는 생체 메카니즘이니만큼 수치스러워할 일도 없는 거예요.」

 

「또 어려운 말을 하는구려 당신은...」 

 

「죽음이란 우리에게 두 가지의 마음을 줘요.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감과 체험에서 비롯된 안도감. 이미 우리 모두는 과거생에 가졌던 ‘죽음의 체험’을 망각할 수밖에 없는 메카니즘 가운데 있으니 불안감이나 안도감이란 애초 자신의 닫혀있는 잠재의식계에서 막연하게 일어난 것이라고 봐야겠죠. 안도에 관한 감각은 막연하나마 너무나도 좋은 감각이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그쪽을 지향하게 돼요. 다시 예를 들자면, 너무도 먹어 위장이 꽉 차있을 때는 위장이 운동을 못하죠. 그땐 먹은 음식물을 토해내야 편하게 돼요. 그때 갖는 편안함은 몸이 추구하는 안도감이에요. 반면에 너무도 허기지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몸이 안도하게 되지요. 성 에너지도 마찬가지예요. 정액이 체내에 너무 쌓이면 밖으로 배출시켜야만 몸이 안도감을 갖게 돼요. 쾌감은 순간적이고 조건적인 일시적 몸의 상태일 뿐이에요. 그 직후 안도감이 찾아오지요. 나아가 몸에서 원하는 것은 지속적 안도감이랍니다. 때문에 간신히 얻은 안도감은 잠을 불러들이지요. 그 또한 이제 사라진 정액을 보충하려는 생리적 현상이지만 안도감을 길게 유지하려는 메카니즘인데, 고갈된 정액은 다시 보충돼야만 편안한 신체 상태로 될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신체 상태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결정지어지고 마음의 상태에 따라 신체의 상태가 결정지어지니 심신은 하나인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하지만 몸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 극단적으로 신속하고 천변만화하지요. 그러니 신체를 정복해서 마음을 통제한다는 방법은 대개의 경우 실패를 하게 돼요. 하타요가가 그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는데 몸을 통제해서 초월적 의식을 획득하려는 것이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오히려 마음을 지배해서 몸을 조절하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적절한 방법이죠. 그건 가능한 길이니까요. 어쨌거나 그렇다 해도, 우리는 ‘순간일 뿐으로 쉽게도 사라지는’ 안도감을 쫓아서만 살아갈 수는 없어요... 기선씨.」

 

「말해 봐요, 금파.」 

 

「지금 기선씨가 하고 있는 명상이라는 것이 바로 저 언덕을 향해 물길을 건너는 뗏목이에요. 살아서 영구한 절대적 안도감을 획득하려는 길 그게 바로 명상의 길인 거죠. 이 모든 무명을 밝혀줄 광명의 세계, 그 세계가 바로 피안인 것이고 평상심의 세계로써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타고 가는 수레가 명상인 거라구요.」 

 

나는 그를 일으켜 식탁의자에 앉게 하고 나도 건너편 쪽 의자에 가서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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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4/29 [13:50]  최종편집: ⓒ 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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