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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획 > 현정수의 수행소설 파라가테
삶의 모든 문제는 마음속으로부터
현정수의 수행소설 '파라가테'<23>
인과와 무상한 변화 속에서도... 다람쥐처럼 쳇바퀴만 돌리고
 
현정수
10.

열쇠를 나한테 보냈다는 건 내실을 돌아보고 관리를 해달라는 뜻일 것으로 짐작이 됐다. 그러나 별다른 전갈은 없이 따로 전화번호를 알아간 것을 보면 통화로써 직접 당부할 것이 있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이 연이어 바로 내려오진 않을 거라는 추측도 해보는 것이었다. 바로 내려올 일이라면 구태여 이런 과정은 불필요할 수도 있는 것일 테니. 아울러 우리가 서로 떨어져있던 동안에도 소년은 결코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확증이 되기도 하여 내심 맘속으론 조용한 행복감이 흐르게 되었다. 마치 나는 소년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로 인정되어진 듯 아주 흡족한 기분상태로 돌아왔다.

기자에게서 메일이 와있었다.


<내 사랑 금파... 그렇게 아쉬움만을 남기고 올라온 저녁 나는 정말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모처럼 다시 찾았던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타관처럼 나의 거처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하여 황량하기까지 하고, 다시 성실을 기해야할 이 일상들은 왠지 구차하게까지도 보이니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듯한 나의 근간은 한편 행운이고 다른 한편은 불운이라는 생각도 드는구려.

당신은 지금 그 한적한 산간, 녹음 짙푸르고 꽃들 만개한 정원을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아니면 책상에 앉아 사유 깊은 그 아름다운 문장들을 적고 있거나 혹은 깊은 관상에 들어있는지... 아무려나, 당신이 무얼 하고 이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나의 소견 좁은 생각으론 당신의 숨쉬는 숨결 그 하나하나조차도 이 세상엔 유익이 될 거라는 예찬을 해보는 것이오.

지나온 나의 시간들 속에서 이토록도 무구한 행복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소. 다시 생각해봐도 어쩌면 이것은 꿈결 속에서나 이루어질까 그려보던 바로 그 이상이었는데, 정말 아무 잘한 바 없이 어엿하게도 나는 이런 상급을 받게 되어 마치 남의 몫을 취한 건 아닐까 어리둥절하게도 되오. 그렇다면 그 실수가 나로부터 빚어진 일인가 신으로부터 빚어진 일인가 곰곰 생각을 해보게도 되는 거라오.

연유는 알 수 없다 해도 나는 필시 이 행복을 놓치진 않을 것이요. 절대 않을 것이요.

등대도 없고 등불도 없이 황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워하며 오히려 나의 정신성마저도 포기하려 했던 숱한 날들 속에 이미 당신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나의 길을 이끌어왔던 건 아니었는지, 나는 그만 그리 생각하려오. 마치 당신은 내 어머니의 화신으로써, 못내 눈을 감기 어려운 존재의 뒤안길에서 나의 어머니는 애닳다 지쳐 그만 당신으로 화해버렸던 것이라고. 정말 나는 그리 생각하려오. 그러면 내가 그만, 남자이기를 주저하고 더 나아가 남자이기를 포기하며 당신을 섬긴다하여 하나 흠이 될 리 없고 욕이 될 리 없을 바이니,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만 이 절통한 한에 대한 보상을 이미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행복하겠다는 고백이오.

언제 다시 가게 될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떨어져있는 동안도 건강을 잘 다스리고 있길 바라오. 행여 수심에 찬 당신을 보게 되는 것은, 혹은 조금이라도 쇠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메어진다오. 어찌 보면 당신은 마치 이 세계의 피뢰침 같은 여인, 하늘로부터 오는 여러 거친 것들을 그 심성으로 받아내어 오히려 정화를 시키고야 마는 듯, 그러나 그리하는 당신의 고뇌란 그 깊이가 측량도 되질 않아, 나는 혼자 있는 동안도 무릇 내가 당신인 듯, 당신의 모든 걸 흉내 내어 삼가고 신중하고 너그러워지라고 스스로에게 조심히 타이른다오. 진심으로 사랑하오.

6월 8일 기선.


추신: 소년, 고숙(姑叔)의 신분만을 알아냈다오. 그리고 내일 새벽으론 소년의 집을 가서 지켜볼 것이오. 아울러 또 한 가지는 당신의 원고가 다음주 월요일, 말씀드렸던 이번 두개의 취재와 함께 한 지면에 실리게끔 조정이 되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요. 내림굿과 진오귀굿 및 뮌혠 프로덕션에 관한 기사까지 모두 문화면에 게재될 것이라오. 총총.>


나는 바로 답신을 보냈다. 그간 소년의 집에서 사람이 다녀갔던 내막과 소년의 안위에 대해 들었던 안도할 만한 일에 대해서. 그리고 이 메일을 보게 된다면 새벽으로 소년을 찾아가려던 일정은 바꾸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그리고 앉아 곰곰이 마저 더 생각하다가 재차 그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누락된 추신. 미진한 것이 있어 다시 기별을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 금요일에 있다하신 진오귀굿에 대한 일인데, 나는 그만 어떤 마음으로 그 취재에 함께 동행하겠노라 말씀을 드렸지요. 그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던 어머니에 관한 미련으로써, 어머니와의 사별에 대해 그토록 사무친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어떤 운명이었거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데에 관한 회한이 불쑥 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떠나신 어머니가 어디 먼 데 계신 게 아니라 이 맘속에 있는 것일 텐데, 굳이 타인의 진오귀굿에까지 찾아가 애태울 일도 없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어쩌겠어요, 남의 조상을 불러오는 굿마당에서...

뿐만 아니라 문득 스친 생각이지만 일전에 산중에서 벌어졌던 그 일이 떠오르며, 혹여 남의 대사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알량한 생각이 생겨난 것도 적지 않은 비중이고요. 물론 저야 대수로운 의식의 사람은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무속인들에게 있어서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반가운 손님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래서... 금요일엔 여기를 들르시질 말고 그냥 혼자 가셔야겠다는 생각을 전합니다. 단순한 변덕이 아닌 것으로 읽어주시면 크게 감사하겠어요.

아울러 먼 데, 이곳 산간에서도 늘 평화를 기원하고 있음을 전합니다. 6월 9일 금파.>


생각을 바꾼 것은 잘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어쩌겠는가... 타인의 조상을 불러내어 한 맺힌 넋두리로 묵은 마음을 정리할 남의 천도제에서... 그리고 나는 그 간의 나를 돌아보면서 쓰다가 방치해두었던 소설 원고를 끄집어내 써가던 끝 부분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살면서 진정 마음을 기울여야 할 ‘그 무엇’이란 무얼까, 나는 그 길에 들어서있기는 한 것일까, 그 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인연은 각기 서로에게 어떤 중대한 영향들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 그런 등속의 생각들을 하는 나였지만, 그간의 내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년과의 해후라는 그 엄연하고 엄숙한 사실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 나는 아침 일찍 명상도 채 끝나기 전에 소년의 고모에게서 전화를 받게 되었다.

「여보세요? 제가 윤 교수 누나 되는 사람인데요, 전에 영결식장에서도 만났었지요...」

「아, 네. 안녕하셨어요? 안 그래도 어제 아주머니께서 다녀가시면서 열쇠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면서 시작된 통화였지만 이내 친밀감 있게 대화를 이어갈 수가 있었다. 고모님은 소년 때문에 여간 근심이 아닌 것이 대화 중에 역력하였다. 사실 그렇기도 할 것이었다. 한 사람의 장래가 달려있기도 하거니와 소년은 동생의 흔적으로서는 세상에 남겨진 단 한점의 혈육으로서 고모님에게야말로 소년의 장래란 책임감이 막중히 요구되는 사안일 것이기에.

어제 들은 바대로 고모는 소년이 머잖아 다시 여기로 내려오게 될 것이라는 점과, 앞으로 나에게 많은 신세를 지게 될 것에 대해 미리 구하는 양해, 그리고 과거에 소년의 아버지를 구한 일에 대한 뒤늦은 치하 등을 말했다. 열쇠를 맡긴 까닭은 결코 남 같지 않은 내게 기대고자하는 의도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대목에서는 적지 않게 놀랬다. 고모님은 왜 나를 남 같지 않다고 여기게 됐을지 의문이었다.

고모님의 뜻대로 나는 일어나 소년의 집을 둘러보러 나갔다. 소년의 집을 둘러본다는 것은 내겐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받기에 과분한 직분을 맡는 것과 유사한 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관심과 아울러 부담스럽기도 한 것은, 어찌 내가 소년의 내실을 함부로 확인할 수 있겠는가라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마치 불경한 어떤 일을 하는 것처럼 내겐 너무도 외람되다는 느낌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소년을 위하여 집 안팎을 둘러보고 소년의 아버지가 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곳에 손길을 나누어줘야 할 필요는 있었다. 아무리 정돈이 잘 되어있다고는 해도 오랫동안 비워져있던 느낌을 지울 수는 없을 테니까.

소년의 집 현관을 들어선 나는 일종의 고적한 신비에 휩싸였다. 커튼을 통해 들어온 빛에 반그림자 진 실내는 마치 포근한 흙으로 다져진 동굴처럼 아늑한 느낌을 자아내어 떠나와 있던 고향인 듯 막연하나마 익숙한 기분을 일게 하였다. 커튼을 열었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마루바닥으로 아침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마루 중앙으로 가서 눈을 감고 오랫동안 서있었다. 몸에서 감지하는 고르고 은은한 진동은 이 집의 주인과 사물들이 자화되고 공명되어 만들어진 기운일 것이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서있자니 말할 수 없이 고원한 데로부터 다가오는 요요(遙遙)한 선율마저도 들리는 듯 하였다. 여기서 소년은 존재의 비밀 그 영원한 메시지에 나날이 접했을 터였다.

베란다의 페어그라스를 통해선 계곡과 반대쪽 산허리 그리고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밖에서는 그저 이층 구조의 아담하고 예쁜 양옥일 뿐이건만 실내에서 베란다를 통해 계곡을 내려다보니 마치 아주 높은 곳을 올라와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실은 고결한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오는 오크색 나무 벽에 적당한 조명등을 설치하여 실내공간에 격조를 더했고 바닥은 마치 무용연습장처럼 마루를 깔아 파티션도 하나 없이 여백의 미를 한껏 살려 간결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게 했다. 중앙에 깔려있는 한 길 크기의 카펫은 명상 자리로 쓴 듯해보였다. 그리고 실내조명을 의도적으로 아늑하게 줄이는 역할도 겸한 천정에 드리워놓은 두 줄의 실크 피륙은 바닥의 페르시안 카펫과 적절하게 어우러져 고풍의 이국적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나는 저절로 숙연해졌다. 카펫에 가서 앉아보았다. 소년과 자화된 실내의 진동은 이내 나의 내부로 부드럽고 빠르게 전이되어 들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소년을 그리워하고 있다거나 그와 관계된 진한 정서들 속에 속박되어있는 것에는 이유란 없었다. 더불어 목적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조절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서까지 그를 향하고 있는 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일까에 관해선 나 스스로도 전혀 파악이 되질 않았다. 거듭되는 생각의 진전들 속에서 이런 것을 ‘신앙적 추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자 그 자리에서 잡다한 의문들은 중지되었다. 믿고 그리워하고 따르고자 하는 데에 일체 여타의 장애요인조차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신앙심 아니겠는가. 더욱이 내 마음은 소년을 향해서 열절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 열절함 가운데는 분명한 조급증과 고통이 따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이유도 목적도 없는 신앙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조급증이나 고통도 수반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그 순간 가슴속에 철렁하는 충격이 일었다.
 
이 어찌된 모순이란 말인가. 참된 신앙이라면 절대적 겸허와 조복(調伏) 이외에 무엇이 더 있을 수 있단 말일까. 그러니 이 마음속에 있는 고통과 조급증을 어찌 탐심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대상이 신성(神性)이라 해도 그것이 소유욕에서 출발한 것이어는 거기 어찌 고통이 따르지 않을 수 있었으랴.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주먹으로 가볍게 바닥을 거푸 두들겼다.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그것은 자탄의 회심(悔心)이었고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조차 없는 비탄이었다. 더욱 비워져야 했다. 한없이 비워져야 했다. 현생의 문제를 과거생으로 연계시켜서까지 이해를 해보는 태도는 얼마나 통어(統御)된 어리석음이란 말인가. 나는 이 강력하고 우매한 집착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그는 말했었다. “나는 아버지와 늘 함께 있어요... 그러니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금파.” 라고.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있지 않음을 한탄할 일이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에 하늘가에 구름 피어나듯 둥싯 그가 나타났던 환상마저도 체험하질 않았던가. 비록 그것이 환상에 불과했다 해도, 아니 어쩌면 환상이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을 재삼 각성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통어(統御)하는 것처럼 어렵고 고난스런 과제가 그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나무계단을 통해 이어진 이층은 방이 세 개로 두 방은 아버지와 아들의 침실로 쓰이고 있었다. 주방과 욕실이 정갈하여 살림집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이는 것이지 그곳은 침실이 딸린 서재라든가 아뜨리에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듯했다. 거실은 베란다 쪽과 주방을 제외하곤 모두 천정까지 닿는 이중서가로 둘러싸이고 한 쪽엔 서장용 아담한 사다리가 세워져 있었으며, 베란다 쪽으론 고풍의 흔들의자가 외롭게 놓여져 있었다. 또 하나의 방도 역시 장서로 가득 찬 서가가 들어차서 서재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창쪽으로 놓여진 책상 옆으론 검정색의 융으로 덮인 서예탁자가 있었다. 그 위에는 문집과 벼루 및 문진이 정갈하게 놓여져 있었으며, 대중소의 붓들은 나무로 만든 스탠드 장식에 하나하나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세필들은 목각필통에 꽂혀있었다.
 
남자들만 사는 집이 이토록 섬세하고 짜임새 있게 정돈되어 고고한 품격을 발하는 이 경우는 참으로 기이한 느낌을 들게 했다. 실내에 배인 묵향은 아직도 은은하고 도도하였다. 서예작품이 벽장식으로 쓰이질 않았다는 건 의외였지만 어쩌면 모두 정리하여 고모님 댁으로 옮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친의 침실은 침대며 콘솔 및 서랍장 등 모든 가구가 흰색 무명포로 덮여있었다. 나는 소년의 침실로 보이는 또 하나의 방은 열어보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익숙한 놀이터인 그 어떤 동굴로 일과처럼 향하는 어린애같이 매일 그곳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소년을 느꼈다. 그렇게 그 주간이 지나갔다. 비가 많이 오던 금요일엔 하루 종일을 소년의 집에서 지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1층에서 명상도 하다가 2층에선 흔들의자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기도 하였다. 소년의 아버지의 장서는 거의 작은 도서관 수준이었다. 문학 철학 종교 예술 건축 서예 화훼 및 고서와 각종 원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걸쳐 결코 빠지지 않을 분량의 장서였다. 그 중에는 소년의 손길이 지나간 책들도 무진하게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내 집에서 작업을 하고 그 집에서 휴식을 하는 셈이었다.

서울의 날씨는 30도를 육박한다는 소식이었으나 이 산간은 무더위라 해도 산바람과 산 그늘이 더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더욱이 금요일의 비는 지난 월초에 내린 비만큼은 아닐지라도 제법 상당한 량의 강수였기에 계절의 열기를 한층 꺾어놓은 셈이 되어서 특히 이 산간에선 더위란 쉬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의 벗은 숲이요 새들이며 계곡물소리와 하늘, 그 밖의 자연이었다. 명상과 산책 글쓰기와 달리기는 소년으로 인해 신생된 극단의 외로움을 극복해가게 하는 큰 힘이었지만 덕구와 함께하는 산책과 달리기를 통해선 소년과 함께하는 듯한 마음마저 가져보려 애쓰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덕구가 내 맘에 큰 위로가 되고는 있다 해도 그건 어찌 보면 하염없이 슬픈 마음작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랬다. 그렇게 삶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는 항상 마음속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밖의 외부 객체는 늘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항상 일어날 일은 일어났던 것이었고 있는 모든 것은 늘 그대로 상관이 없었으나 문제는 항상 그것을 트집 잡는 마음속에 있었을 뿐이었다. 흥하는 사람은 흥할 원인에 의해 흥했고 망하는 사람은 망할 원인에 의해 망해왔다. 섭생과 마음의 관리를 잘못한 사람은 병에 걸리는 것이었고 선행을 베푼 사람은 그 마음속에 평화가 깃들게 되어있었으며 타에게 언짢음을 끼친 사람은 스스로 불편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니었던가. 그러한 인과와 무상한 변화 속에서도 자연은 나날이 우리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제공하고 교류할 준비가 잔뜩 되어져있건만 우리는 그것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와서 작은 마음의 일에만 매달려 무척이나 중대한 일인 듯 다람쥐처럼 쳇바퀴만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 또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었으리.

토요일 오후에는 고모님께로부터 전화가 있었다. 만찬에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정말 뜻밖의 초대에 나는 너무나 외람되고 황망하여 다소 사양하는 투로 말을 했다. 물론 내심으론 소년을 만나볼 수 있다는 감격적인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교수님의 서예전에 관해서라면 내가 관련되어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글쎄 금파선생 뜻은 충분히 알아들어요. 그래도 그냥 한번 놀러온다는 기분으로 오시면 좋겠어. 그리고 얘 뜻이 그리도 완강하네. 제자들이나 서예 후배들 중 이렇다 할 분들도 꽤 있는데 굳이 금파선생에게 맡겨서 진행하겠다는 거야. 아래윗집으로 마주하면서 살더니 선생님을 무슨 이모님처럼 의지하나봐.」

나는 더 이상 사의를 표하는 것이 결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응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부담스런 사안이라고 해도 그 생각은 이내 떨쳐 버릴 수 있었으나 더욱 머릿속은 소년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어버렸다. 아니 머릿속이라기보다는 가슴속이라고 해야 하는 게 옳았다. 며칠 후면 소년을 만나게 된다는 기쁨은 나를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둥둥 떠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끔 만들었다. 고작 하루 두 끼 먹는 저녁식사마저 건너뛰고 있었던 것도 시장함이 극에 달한 한밤중이 돼서야 알아차렸다. 그것도 기선이 몰고 온 자동차 엔진소리에 후두둑 정신이 돌아온 연후에서였다. 기선은 지난주처럼 자동차에 물건들을 가득 싣고 나타났다.

「금파, 금파, 오오... 금파!」

그는 뛰어와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미소로 그를 반겼다. 덕구도 그에게 뛰어오르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간 잘 있었소? 어제는 비 때문에 무섭지는 않았고? 여전히 건강하오? 덕구 이 녀석, 너도 잘 있었지?」

그는 몸을 낮춰 덕구를 쓰다듬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아... 서울은 정말 더워요. 소음과 더위 그리고 나날의 전쟁들이 이젠 견디기가 수월치 않아요. 정말 난 여기에 내려와서 살고 싶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오, 금파.」

그는 짐을 두 차례에 걸쳐 옮기고 나서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것 좀 줘요. 당신이 만들어준 그 배옷 말이요. 내가 편한 바지도 하나 가지고 왔다오. 저녁은 오면서 휴게소에서 우동으로 때웠지. 당신을 피곤하게 하기 싫어서 말이오.」

악의 없이 웃는 그의 잇속이 단정했다.

「밥 차리는 건 하나도 안 피곤해요. 식사를 더 할래요? 나도 실은 저녁을 안 먹었거든.」

「이 시각까지 식사를 안 하다니! 어쩌다가 그랬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설마 나를 기다려주느라고 그랬던 건 아닐 테지?」

우리는 함께 앉아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오빠 같기도 하고 아기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바와 같은 고뇌 속에서 살아왔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행복감이란 사람을 무구하게 만들어주는 큰 힘이 있는 것이었다.

「금파, 당신은 행복의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 같아요.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좋겠소.」

「행복감은 당신 마음속에서 절로 생겨난 거죠 무슨... 당신 머릿속에서 금파를 만나면 기쁘다는 당신의 판단이 그 마음을 주무르는 거지요, 뭐...」

「아니, 그 판단이 저절로 생겼겠소? 당신에 대한 감격이 내게 느낌을 일으키고 그 느낌에 의해 내 머리가 그런 판단을 갖게 된 것 아니오. 그러니 당신이 내게 그 향기를 뿌렸다고 볼 수밖에... 하하하, 안 그래요?」

「그게 당신의 선입견에 의해서 생긴 관념이라니까요... 만일 내가 당신에게 지속적으로 냉담했더라면 그런 느낌을 갖게 됐겠어요?」

「아니,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냉담할 수 없는 여인이요. 나는 당신에게서 자비심을 보았소. 내가 당신을 범인들과 다르게 느끼고 있는 건, 그리고 메일에서 밝혔다시피 당신 앞에 서 남자이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미 당신은 성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분명한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요. 나는 당신을 내 욕구대로 마구 잡아당길 수 없어요. 내게는 그럴 힘이 없어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건 당신을 오염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부분이 나는 황홀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했다오. 금파, 나는 당신을 세속적으로 소유하고 싶소.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유로운 고결함을 훼손하는 일이 될 거요. 물론... 이 순결한 정신적 행복이 나를 충만하게 만들곤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 건강한 사내인 나를 육체적 고통과 갈등에 잠기게도 만든다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관찰해 보세요.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고, 특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서 변하게 되는 무상한 거니까요. 나는 미욱한 한 사람의 여자일 뿐이에요. 마땅히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에 속는 일은 없어야 해요.」

「변하다니요? 그리고 허상이라니요? 당신은 우리 같은 보통의 사람들하고는 사뭇 달라요. 상황에 따라 변하기에는 당신은 뭔가... 우리가 찾아내야 할 비밀스런 무언가를 이미 찾아내고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당신은 어떤 특정한 조건에 따라 조절되고 변화되어지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본질적이요. 나는 미욱한 놈이지만 이것은 당신이 가르쳐준 명상이라는 내면의 시간들 속에서 파악된 내용이라오. 그 시간을 통해서 나는 그간 내 고착된 관념은 얼마나 사물을 표피적으로만 파악해왔던 것일까를 돌아보게 되었소.」

「아! 그 사이 좋은 시간들을 많이 가지셨군요!」

「그래요. 당신의 말은 내게 있어선 율법이요. 나는 거의 매일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좌선을 했어요. 무려 하루에 다섯 시간을 앉아있던 날도 있었다오. 그래도 이상한 건 수면부족으로 고통을 받진 않았다는 것이오. 그게 아니라 부족한 수면에도 불구하고 두뇌는 오히려 명료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오. 그 시간들을 통해서 나는 내 내면에 있는 것들이 너무도 조악하고 무질서하게 좌충우돌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적 기분이 들기도 했다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비록 내가 그토록 불운한 과정을 지내왔고 우울한 그늘 속에서 목소리 한 번 키우기도 힘든 삶을 지내왔긴 했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역은 나라는 분명한 긍지가 있던 놈이었소. 그러나 그러한 자긍심은 대번에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뀌고 말았다오. 온통 마음속은 분노와 탐욕뿐이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요. 나는 내가 그토록 무가치한 놈에 불과한 줄은 몰랐어요. 그랬건만... 그래도 당신은... 그런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자애롭게 받아준 것 아니요? 그러니 나의 정신은 당신을 어머니로 섬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오. 하지만 지극히 동물적인 이 육체가 당신을 다른 각도에서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내면에서 발견했을 땐, 나는 마치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몹시도 괴로웠다오. 그 갈등들... 그것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강퍅한 이 세상에 대한 분노로 드러나 나는 내가 한 마리의 광폭한 야수에 불과하다는 것도 체험했다오. 금파, 당신의 말대로 이 길은 험난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소. 너무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던 날엔 죽어버릴까도 생각해봤다오. 말하자면 자살 말이요. 그런데 내가 의문을 갖게 된 것은 그렇게 내면의 투쟁적 시간들을 겪고 난 그 명상 후에도 나의 몸은 그럴 수 없이 평화로워 진다는 점이었소. 정신은 투쟁을 겪고 있는데도 몸은 행복하니 말이요. 늘 명상에서 깨어날 때 나는 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오. 금파, 나는 진정 스승이 필요해요. 육체가 요구하는 목적은 그 성취가 너무도 한시적이요. 나는 그보다 고원한 것을 찾고 있소. 만일 내 아버지도 보다 높은 정신적 목표가 분명했더라면 그토록 불행한 길을 가지는 않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나는 육체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

「잘 하고 있어요. 정말 존경스러워요. 이 길은 때가 된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길, 가장 큰 스승은 자기 자신 뿐이에요. 모든 것은 생겨나고 변화하고 죽는 것처럼 당신 내면의 마음작용도 그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당신은 당신을 망하게 하지 않아요. 인간의 순수한 본질이란 아직은 잠자고 있다 해도 깨고 나면 극단적 지성 그 자체예요. 그것은 판단하지 않고, 행위 하지 않는 것 안에 있어요. 마음은 객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울러 당신의 마음이 정녕 당신의 실체는 아니라는 걸 파악해야만 해요. 손님에 의해 주인이 휘둘러지는 경우란 모순 아니겠어요? 그런 과정이 지나면 육체와의 동일시도 어느 때인가 중지되게 되겠죠. 육체가 우리의 주인은 아니니까요. 아직은 우리 의식체가 육체의 지배를 받고는 있지만 그 허와 실을 꿰뚫는 날 그게 허무맹랑한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에요. 육체는 이 의식체가 존재하는 수단일 뿐이었다는 것을요. 말하자면 진화를 위한 도구라고나 할까요... 그냥 존재적 상태에 잠겨있어 보세요. 언어를 버리고... 규정짓지 말고... 휘둘리지 말고...」

「어려워요, 금파. 쉽게 풀어서 얘기해줘요.」

「말할 수 없어요.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가다보면 깨닫는 날이 올 거예요. 아... 언어를 버린다는 것, 규정짓지 않는다는 것, 행위 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그것이었구나! 그렇게요.」

나는 일어나 포트를 렌지에 얹고 주섬주섬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의 자기관찰이 부쩍 심도를 더했다고 느껴지니 한없이 다행스럽게 생각이 됐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의식체는 자기해방을 향해 노 저어 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의식의 혁명이고 진화 아니겠는가.

「무슨 차로 할래요?」

「혹시 금파차는 없을까? 나는 금파차로 한 잔 할래요. 당신이 만들어준 것이라면 나는 독약이라도 달게 먹을 거예요.」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웃는 그가 사랑스러웠으나 그 뒤에 가려진 침울함은 언뜻이나마 숨길 수 없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눈을 흘기고 용정(龍井)차를 준비했다.

「호오... 이것이 금파차란 말이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동그랗게 한 채로 나를 천연덕스럽게 쳐다보았다.

「이건 용정차예요.」

「그럼 임금님만 마시는 찬가?」

「그게 아니고 용정은 샘물 이름이에요.」

「오호 딴은 샘물이겠네. 그게 그럼 용이 승천한 샘물인가?」

「그건 그 샘이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그 속에 용이 산다고 생각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구요, 그 후에 거기 세워진 용정사란 절에서 이 차를 재배한 것이 유래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차라는데 지방질을 분해하는 요소가 있어서 닭백숙 끓일 때 이 찻잎을 넣으면 아주 담백한 맛을 낸다지요. 생선요리 할 때 냄새제거를 위해서 넣기도 하구요. 항주(抗州)에서 재배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녹차라지요. 원나라 때부터 재배해 왔대요.」

「흐음... 그런데 향이 무척 진해요. 맛도 아주 부드럽구요.」

「차 맛을 보는 미각이 일품이군요. 이 차는 식후에 마시기에 가장 적절한 차예요. 식후에 그 맛을 제일 크게 느낄 수가 있지요. 이 차는 산수가 아름다운 중국 항주 서호(西湖)의 빼어난 자연의 기운을 가득 담고 있는 차인데 ‘사절(四絶)’이라고 호평을 받고...」

「사절(四絶)?」

「네, 짙은 향, 부드러운 맛, 비취 같은 녹색 그리고 참새 혀 모양의 잎사귀라는 네 가지 특징이요. 뿐만 아니라 중국 예방의학 과학원의 연구원이 항암차로 발표한 17가지 차 중의 으뜸으로 평가되는 차랍니다. 비타민 C와 안기산 등 유익한 성분이 다른 차보다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해요. 용정차는 모두 16등급으로 나뉘는데 이건 1등급이에요.」

「차들도 모두 등급이 있소?」

「그럼요 그 등급의 기준은 차를 따는 시기나 산지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서호용정은 채취한 선엽(鮮葉)의 노눈(老嫩) 및 채취시기에 따라 품질이 결정되지요. 1등급 차는 청명 이전에 딴 것으로 명전(明前)차라 하고 2등급은 곡우 이전에 딴 것으로 우전(雨前), 곡우 날로부터 곡우 후 5일까지 채취된 찻잎을 두춘(頭春)차라 하지요. 또한 곡우 후 6일부터 10일까지 채취한 찻잎은 이춘(二春)차, 곡우 후 11일부터 입하 날까지 채취한 찻잎은 삼춘(三春)차 혹은 삼첨(三尖), 그리고 입하 후부터 채취한 찻잎을 가리켜 사춘(四春), 난청(爛靑), 장대(長大)라고 하는데 그게 품질의 순위라고 볼 수 있어요. 그 외에 여름과 가을에 따는 것으로는 쟈스민차나 홍차를 만들어요. 연꽃잎을 띄워서 마시면 술배가 들어간다는데 당신은 배 안나왔잖아요?」

「당신이 뭐 내 배를 보았던가? 내가 언제 배를 보여줬던가?」

그가 능청을 떨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많은 차의 종류와 특성을 어떻게 모두 알고 있는 거요? 정말 놀라운 걸.」

「오랫동안 차를 가까이 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요 뭐.」

「나는 여자신선에 대해선 들어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당신은 여자신선 같아.」

우리는 또 한 번 웃었다.

「그런데 이번엔 차 달이는 방법이 이전과 달라요. 이번엔 찻물을 끓였다가 한참 식혀서 붓는구료?」

「이건 발효차가 아니라서 그래요. 녹차 달이는 법은 물을 팔팔 끓였다가 7-80도 가량으로 식혀서 찻잎을 우려내지요. 이 차는 황녹색의 물색과 깊은 맛으로 인해 '녹색의 황후'라고도 불린답니다. 그러니 당신은 엄밀히 말해서 금파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녹색의 황후를 마시는 거지요.」

「흐음... 그렇지만 내겐 당신이야말로 녹색의 황후인 걸! 산간에 거하는 여자신선, 내 마음의 녹색 황후. 아아, 내가 녹색의 황제이면 좋겠소.」

그의 익살에 나는 또 한번 웃었다.

「참! 취재는 잘 다녀왔구요?」

그는 취재를 하면서 느꼈던 느낌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이 산간에서 근자에 일어났던 총체적인 일련의 흐름들을 통해서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내적인 변화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의 인류의 발자취와 현상에 대해 탐사와 고증을 통한 연구로 인간의 기원과 궁극까지 진지하게 헤아려보려는 뮌혠 팀들의 자세에 대한 감동도 심도 있게 얘기했다. 그리고 그 기사를 마무리해서 넘겨주고 오느라고 늦게 도착하게 된 것이라는 부연도 빠뜨리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주말과 큰 차이는 없는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전과 다른 중대한 차이가 있다면, 진보라고 할까, 그가 자신의 내적관찰을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고 진지하게 시도하고 있더라는 점이었다. 그건 그에게 있어선 상당히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 다행스런 점은 우리 관계를 단순한 남녀관계로 몰아가려 하지만은 않는 그의 지성이었다. 만일 그에게 특수한 상처가 없었더라면, 다시 말해 그의 모친이 부친에게 살해됐다는 특수한 배경이 없었더라면 나를 대하는 그의 심경은 사뭇 다르게 발전했을는지도 몰랐다.

부친에 대한 원한은 그에게 있어 절대 절명의 과제였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그 사건이 그의 인생 전 과정에 끼쳤던 정신적이고도 실질적인 영향이 말해주는 만큼, 상상해보건대 그 심적, 실질적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대했을 것이라는 건 명약관화했다. 나는 그가 언젠가는 그 극한의 충격과 상흔에서 벗어나, 미욱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전체적 인간에 관한 동병상련의 연민으로써, 그 아버지마저도 자비롭게 받아들일 복된 날이 찾아오기를 참되게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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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5/03 [09:27]  최종편집: ⓒ 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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