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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으로 본 천지-코스몰로지
'제 2회 천부경의 날'학술대회 발표 논문 '소리철학으로 본 천부경'<4>
박정진 철학인류학자 - '소리철학, 포노로지를 제안하며'/소리의 시대로
 
박정진
3. 천부경으로 본 천지-코스몰로지(Cosmology)

앞에서 네오샤머니즘(Neo-shamanism)으로 본 천지인 사상을 살펴보았다. 이 장은 앞장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단지 샤머니즘이 종교적인 입장에서 천부경을 살펴본 것이라면 이 장은 가급적이면 수리적(數理的) 차원, 상수적(象數的)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차원에서 천부경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샤머니즘은 어디까지나 하늘을 신이라는 생각하는 관점, ‘하늘=신’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샤먼의 신은 ‘고등종교의 신’과는 달라서 어떤 샤먼이 특정의 신, 혹은 귀신에게 빙신(憑神)들거나 빙의(憑依)드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빙신 드는 신은 큰 신도 있고, 작은 신도 있고, 잡신도 있다. 샤먼의 신은 범신이다. 이 말은 빙신 드는 자가 어느 차원에서, 어떤 신에게, 어떻게 신이 드는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선도는 천지인에 대한 깨우침이 중요하다. 이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선도의 신(神)은 자신이 쌓아 올라가는 신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굳이 신(神)이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깨달은 자는 그 이름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특정의 ‘말의 성경(聖經)’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가장 객관적이면서도 각 문화권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혹은 말 때문에 빚어지는 해석의 장벽이 없는 수(數)를 가지고 수리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천부경이다. 이는 음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천부경을 우주적 음악 혹은 본음(本音)이라고 한다.

음은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신’이 아니라 ‘움직이는 신’이다. 움직이는 것에는 항상 소리가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상정하는 것은 ‘생각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의 영원(eternity)이나 보편적인 법칙(law)에 대한 환상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 동(動)에서 인간이 가장 독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동(動)에 대한 반사적 생각으로서 ‘움직이지 않는 것’ 정(靜)이다. 이는 ‘유일신’ ‘절대적인 신’에게도 들어있다. 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린다. 나아가서 소리보다 기(氣)의 파동은 소리보다 더 먼 곳에서도 빛의 속도로 도착한다.




1

天의 입장에서 천지인 해석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부경, 상경

天經(28자)

一始無始一/析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一積十鉅 無櫃化三



3

人의 입장에서 천지인 해석

人中 天地一

천부경, 하경

人經(27)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妙衍



2

地의 입장에서 천지인 해석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천부경, 중경

地經(26)

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一終無終一



<천부경(天符經)>

◇ 상경: 28자

①하나의 시작은 시작이 아닌 하나로다.

(하나는) 세극으로 나누어도 근본을 다함이 없다.

②하늘은 하나이면서 하나이고, 땅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사람은 하나이면 서 셋이다.

(하늘은 하나의 하나이고 땅은 하나의 둘이고 사람은 하나의 셋이다.)

③티끌(미세우주)이 모이면(적분되면) 우주(대우주)가 되고 궤(몸체)가 없 으면(無櫃)(미분되면) 셋이 된다. (무無의 성궤聖櫃는 변하면 셋이 된다.)

(一始無始一/析三極 無盡本/天一一 地一二 人一三/一積十鉅 無櫃化三)


◇ 중경: 27자(24)

④하늘은 둘이면서 셋이고, 땅도 둘이면서 셋이고, 사람도 둘이면서 셋이다.

⑤크게 셋을 통합하면 육이 되고, 칠, 팔, 구를 생한다.

⑥삼과 사를 (중심으로) 운행하면 오와 칠의 환(주변)을 이룬다.

하나는 묘연하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大三合六 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妙衍)


◇ 하경: 26자(29)

⑦만물이 오고간다. 쓰고 변해도 근본은 움직이지 않도다.

⑧본래 마음은 근본이니 태양처럼 찬란하도다.

⑨사람 가운데 천지가 하나로다.

⑩하나의 끝은 끝이 없는 하나이다.

(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一終無終一)


* 상경의 해석에는 이견이 없으나 중경과 하경에는 어디서 끊느냐를 두고 학자들마다 다르다. 필자는 28/27/26의 입장에 있다. 상경의 끝자인 삼(三)이 순환의 법칙에 따라 중경에 연결되고, 중경의 끝자인 연(然)이 하경에 연결된다. 따라서 삼과 연을 중첩된 연결로 보면 상․중․하경이 모두 27자가 된다. 그래서 27×3=81자 로 균등하게 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일묘연(一妙然)을 하경에 두기도 한다.

 
한민족의 최고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상경(上經=天經)을 보자. 상경은 하늘의 원리를 중심으로 천지인의 섭리를 풀어준 것이다. 상경은 천지인으로 말하면 천(天)이고, 원방각으로 말하면 원(圓)에 해당한다. 따라서 상징성이 가장 강한 부분이다.

하나는 시작이라 하되 시작이 아닌 하나로다.

(하나는) 세극으로 나누어도 근본을 다함이 없다.

하늘은 하나이면서 하나이고, 땅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사람은 하나이면서 셋이다.

(하늘은 하나의 하나이고 땅은 하나의 둘이고 사람은 하나의 셋이다.)

티끌(미세우주)이 모여(적분하면) 우주(대우주)가 되고

궤가 없으면(無櫃)(미분하면) 셋이 된다.

(무無의 성궤聖櫃는 변하면 셋이 된다.)

(一始無始一/析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一積十鉅 無櫃化三)


“하나는 시작이되 시작이 아닌 하나이다.”

이 무슨 말인가. 말을 해놓고(던져놓고) 곧 바로 뒤에서 잇달아 앞의 것을 부정한다. 이러한 자기부정을 할 수 있었다니. 이 구절은 지금 최첨단의 서구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론과 해체론과 기호론으로 보아도 엄청난 말이다.

“하늘을 하나이면서 하나이고, 땅을 하나이면서 둘이고, 사람은 하나이면서 셋이다.”

이 말은 ‘하나’라는 것을 보편성으로 놓고 그 다음에 다시 ‘하나’ ‘둘’ ‘셋’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하나’는 무엇인가. 이는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위의 뜻을 상수학적으로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은 ‘하나’이며 ‘근본’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땅과 사람도 ‘근본=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하나(象數)=하늘(事物)=님(한울님 : 神人格)=하느님(人格, 기독교)


무궤화삼(無櫃化三)은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티끌(미세우주)이 모이면(적분되면) 우주(대우주)가 되고, 궤(몸체)가 없으면(無櫃)(미분되면) 셋이 된다. “궤가 없으면 셋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작은 미세우주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3수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과학이 밝혔듯이 원자는 양자와 중성자, 전자로 구성된 것에 비할 수 있다. 이는 그 옛날 사람들이 오늘의 원자구조를 알아서 이 말을 했다기보다는 거대우주의 원리는 미세우주에게 투사한 것일 게다.

이 구절은 다시 “무(無)의 성궤(聖櫃)는 변하면 셋이 된다.”고 번역할 수도 있고, 또한 “존재의 상자(櫃)에는 무(無)가 있고, 변하면(化) 삼(三)이 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궤(계약상자, ark)와 같은 뜻으로 볼 수도 있다. 기독교의 신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 삼위일체의 신이다. 이는 신이 3수로 변한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무궤’(無櫃)는 쉽게 말하면 우주의 ‘블랙박스(Black box)’와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결국 존재는 무(無)이며, 존재의 상자에는 무(無)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無)는 신(神)이 될 수도 있고, 일리(一理)가 될 수도 있고, 일기(一氣) 혹은 신기(神氣)가 될 수도 있고, 신비의 X도 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표현의 차이에 불과하다. 존재는 알 수 없다. 존재는 의식과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주체 아닌 주체이다. 세계는 결국 자기원인이고 자기결과이다.




이중성(자기부정)



일시(一始)

무(無)↔

시일(始一)

일종(一終)

무(無)↔

종일(終一)

여기서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이라고 하는 데에 주목하여 보자.

천일일의 앞의 ‘일’은 ‘변하지 않는 일’(一)이다. 그 다음의 ‘일’은 ‘변하는 일(一)’이다. 그 변하지 않는 일은 지일이의 일, 인일삼의 일에도 계속된다. 이 말은 일에도 ‘변하지 않는 일’과 ‘변하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변하는 일에서 이가 나오고, 삼이 나온다. 왜 불변의 일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아마도 천지인은 하나이고, 삼자는 순환관계에 있음을 나타낸 것일 것이다. 방편 상으로 천지인을 나누지만 결코 이들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이는 결국 일(一)과 이(二)와 삼(三)의 관계가 ‘1↔2↔3’의 가역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이들은 존재자이면서 동시에 존재이고, 존재이면서 동시에 존재자임을 당시에 이미 천명한 것이다. 변하지 않는 일은 일종의 ‘초월자적 일(一)’이다. 왜 ‘동일성을 유지하는 일’과 ‘변하는 일’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는가. 이들은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위의 천부경 구절에서 일(一)은 ‘존재자와 존재’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세계는 일(一)에서부터 이중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1↔2’ ‘ 1↔3’의 애매모호함과 이중성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소우주와 대우주가 하나가 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주의 역동성, 혹은 ‘존재↔존재자’의 가역반응을 보장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역동성은 정태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동태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정태적인 것 중에 중성, 혹은 중성자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에 있어서 중성이라는 것은 양성의 실패(잘못됨)이다. 그러나 흔히 양성의 불완전함(이것이 역동성이고 가역성임에도 불구하고)을 극복하는 완전성을 위해서 중성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처의 중성성이다. 이것은 양성에 대한 결과론적 합리화(원인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변증법은 역사적 각 단계마다 존재자 사이의 변화, 즉 ‘존재자(A)→존재자(B)’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선의 연장으로서의 원은 가능하겠지만,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원융은 달성하지 못한다.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으로 상정하는 것 자체가 실은 이성중심주의의 결과이다. 이성주의는 정신, 혹은 물질의 어느 한편에 유일성을 두는 우를 범하게 되어있다. 유물론도 이성주의의 산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성주의가 실질적으로 일어난 사실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그 가부를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그것을 설명하려는 순간 이미 원인론에 빠진다. 그렇다면 결과론은 원인론은 내포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그렇다면 “지금 나는(살아있는 나는) 나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원인은 모르지만 말이다. 그 원인은 알 수 없는 진리, 신, 법칙, 실재, 욕망, 존재, 기(氣)이다. 이것을(알 수 없는 것을) 마치 알 수 있는, 혹은 알고 있는 것처럼 규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원인론이고 합리주의이다. 결국 원인론과 합리주의란 결과에서 소급된 소급주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급주의는 결국 ‘존재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그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고 ‘설명하려한 것’이 되어버린다.

흔히 결과론의 대표적인 철학이나 이론인 자연주의나 생태학주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주의(無氣力主義)에 빠지는 것처럼 위장된다. 무기력주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니다. 무위자연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일을 하는 것이다. 자연은 무슨 거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밖으로 떠벌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은 쉼 없이 자기 일을 한다. 그러한 점에서 자연은 존재이다.

그런데 존재와 존재자는 하나의 몸, 마치 암수동체처럼 하나의 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이 먼저 생기고 인간이 생기고, 인간의 문명이 생겼다고 가정한다면 존재는 결국 존재자를 품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존재는 그 대칭인 존재자를 품지 않으면 그 대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과 역사는 비대칭을 이루었지만 인간의 무의식과 자연은 여전히(끊임없이) 대칭을 원한다. 존재는 존재자를 내포한다. 그래서 이성주의가 있는 것이다.

인과론은 원인이 결과를 낳지만, 결과론은 원인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효과적으로) 그렇게 됨으로써 원인을 끌어안는다. 말하자면 결과적 원인이다. 결과론은 원인의 결과가 아니라 결과의 원인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효과론(efficacy)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thinking)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재고)’(rethinking)이다. 진정한 생산은 재생산(reproduction)인 것과 같다. 소급이나 환원이라는 것도 거시우주론으로 보면 순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순환 가운데 어느 지점에 단절을 둔 것이 다를 따름이다. 하나의 방향을 향하는 지향(志向) 혹은 일점원류(一點根源)도 결과적으로 순환론에 기여하게 된다.

생각은 기본적으로 소급이다. 그런데 명사가 없으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동사만의 생각이란 있을 수가 없다. 동사와 형용사는 존재의 상태이다. 생각은 이미 명사와 대상을 전제하는 것이고, 생각은 이미 존재자로 존재(실재)를 왜곡한다. 그런데 존재는 영원히 달아난다. 인간의 생각이란 그 달아나는 존재를 따라간 흔적이다. 존재는 알 수 있는 것, 나와의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체, 세상 자체이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인 인간은 그것을(시간을 역류하여) 소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인간은 소급하는 존재인 것이다. 소급하는 것, 존재자를 만드는 것이 인간 존재의 특징이다. 그럼으로써 존재론은 존재자론과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마치 남자와 여자가 화해하는 것과 같다. 남녀, 음양은 마치 자신이 존재자인 것처럼 대립하지만 결국 대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가 없이도 살아갈 것 같지만 결국 상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 게 된다.


존재(존재자를 待對)

역동성

존재자(존재를 待對)



정태적: 중성, 중성자(태극)





동태적: 가역반응(↔), 음양



1

3(1, 0): 이중성과 양극성

2

동사

구문(構文, 文章)

명사

결과론(자연, 무의식)

결과론은 원인론을 내포한다

원인론(역사, 의식)

* 존재와 존재자는 암수동체처럼 하나의 몸이다. 생각은 처음부터 재고(再考)이다. 생각은 소급이다. 인간은 소급하는 존재이다.

존재와 존재자의 화해를 위해서는 둘이 암수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딘가 태초(혹은 태초 같은 것)가 암수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사용하는 10진법 숫자에서 바로 0이 바로 그것이다. 10진법에서는 시작도 0이고 끝도 0이다. 0은 원인이자, 결과이다. 0의 이중성이 원융이다. 0이라는 숫자를 발명한 곳은 인도라고 한다.

세계는 완성되어 원융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융한 것이다. 세계는 절대적 존재자가 있어서 하나하나씩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분열하여 저절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천부경에는 0이라는 숫자가 없다. 그래서 1이 0을 대신한다. 그러는 대신에 일시무시(一始無始一)라고 하면서, 0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동시에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고 해서 0을 표현하고 있다. 시작과 끝에서 무(無)를 천명함으로써 0의 효과를 내고 있다. 따라서 0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1을 내세우는 북방기마민족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1은 0이면서 동시에 1이다. 바로 0과 1의 이중성이 바로 원융성이다. 천부경을 잘 해석하면 천일일(天一一)의 앞의 일(一)은 마치 0과 같은 의미로 쓰임을 알 수 있다. 0도 실은 1인 것이다. 1/0은 실은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하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최초의 숫자에는(0이 되든, 1이 되든) 이중성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중성이 없으면 그(최초의 숫자) 이전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중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중성은 끊어진 세계, 절단된 세계, 틈새가 있는 세계, 알 수 없는 세계를 연결하는 방법이고, 세계의 원융성(온전한 세계)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이중성이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고리가 있어야 그 다음의 직선이 가능한 셈이다.


열림

이중성(겹침)

닫힘

열림

6/7/8/9

0(10)/1

2/3/4/5

6/7/8/9

우주는 열려있다

中/空/虛/圓/一/一切

문명은 닫혀있다

우주는 열려있다

肉(6)/北斗七星(7)/八卦(8)/九宮(9)

우주는 열려있다(開)

열/열려있다/열다

*열려있는 우주를 상징하는 용어들

陰陽(2)/三才(3)/四象(4)/五行(5)

다섯/닫혀있다/닫다

肉(6)/北斗七星(7)/八卦(8)/九宮(9)

우주는 열려있다(闢)

손가락은 다섯 개다. 이것을 닫고 열면 열 개가 된다. 양손의 손가락은 열 개다. 아마도 10진법이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얻은 까닭은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것과 양손의 손가락이 열 개인 것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리비아 숫자 1에서 9까지를 손가락으로 센다고 가정할 경우, 우선 손바닥(우주)은 열려있다. 인위적으로 숫자를 세면, 손가락을 안으로 닫게 된다. 그리고 다시 다섯(닫다)을 세고 나면 그 다음에는 닫힌 것을 열게 된다. 열(열다)을 세면 저절로 손가락은 본래대로 펴지게 되고 손바닥은 열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0(10)과 1이 중간에서 이중성을 띠게 된다. 0은 0이면서 동시에 1이다. 다시 0은 0이면서 동시에 10이 된다. 숫자의 ‘0과 1’은 ‘이중성’을 나타내고, 이것은 바로 ‘中/空/虛/圓/一/一切’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하늘(/한/하나//하늘)이 1이 되고나니 땅(/둘/둘레/따)은 2가 되고, 사람(사이/셋/삶/사람)은 3이 되지만, 여기에 0을 놓아야 한다면 어디에 놓아야 할까. 인간은 땅에서 태어난 존재이고, 땅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면 하늘이 1이고, 사람이 만약 하늘과 땅의 사이의 존재로 ‘/’이라면 0은 땅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하늘에서 만들어진(making) 것이 아니라 땅(matrix)에서 솟아난 것이다. 그것의 표시가 바로 ‘1/0’이다. 이것은 시니피앙/시니피에이다. 이것이 가족적으로는 해/하늘/아들이 되고, 달/지구/딸이 된다.

하나(1)에는 존재의 하나가 있고, 존재자의 하나(1)가 있다. 존재의 하나와 존재자의 하나를 구분하기 위해 제로(0)가 생겼다. 제로는 자연의 순환과 그것을 닮은 영혼의 윤회와 원융의 우주를 수(數)와 도형(圖形)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수학과 기하학이 한 곳에 있음을 상징한다. 제로(0)의 이중성은 일종의 ‘상수학(象數學)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존재의 하나이다. 문명은 존재자의 하나이다. 문명이 존재자의 하나인 것은 스스로를 기표(記表)하고 표상(表象)하여야 하는 때문이다. 하나(1)는 제로(0)를 표상한다. 제로(0)는 하나(1)를 의미한다.

이것은 알파벳문명권의 ‘말소리중심주의’에서 차지하는 ‘소리와 문자’의 비유와 같다. 소리는 제로(0)이고, 존재의 하나(1)이고, 문자는 하나(1)이고, 존재자의 하나(1)이다. 여기엔 겹침(포개짐)이 있다. 이 겹침과 연속성을 확실하게 끊어버리는 것과 이성주의는 관계가 있다. 이는 수학의 무리수(無理數)와 유리수(有理數)의 관계와 같다. ‘문자=1=존재자=유리수’는 바로 이성주의의 연쇄이다. ‘소리=0=존재=무리수’를 대조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소리는 ‘기의=의미’이고 문자는 ‘기표=표상’이다. 소리는 자연의 순환과 원융의 우주를 나타낸다. 문명권으로 보면 알파벳 문명권은 문자와 존재자의 일(1)에 치중하고, 동양(동아시아) 문명권은 소리와 존재의 일(1) 혹은 제로(0)에 치중한다.


소리

존재의 하나, 0

하나(0)의 기의=의미

문자

존재자의 하나, 1

하나(1)의 기표=표상

*알파벳 문명권은 문자와 일(1)에 치중한다. 이에 비해 동양(동아시아)문명권은 소리와 제로(0)에 치중한다.

한국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하늘의 경전, 천부경(天符經)은 일(1)을 사용하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고 함으로써 일(1)을 제로(0)의 의미로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고금동서(古今東西)에 일찍이 없었던 사건으로, 일대 정신적 혁명으로 주목된다. 왜, 우리(한민족)은 그 옛날에 하늘을 ‘천부’(天符)라고 말했을까. ‘하늘경전’을 의미한다면 천경(天經)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부(符)자를 넣었을까. 부(符)는 부호(符號)이며 기호(記號)이다. 부호는 상징이고,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예컨대 한민족의 조상들은 처음부터 하늘을, 오늘날 최첨단의 철학에서나 논의하는, 부호처럼 보았다는 말이 아닌가.

오늘날 인간이 사는 땅을 지구(地球)라고 한다. 지구(地球)의 구(球)자는 둥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태초는 1/0에서 이중성과 애매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 이중성이 인간에게 고스란히 숨어 있다. 인(人)은 ‘/’이다. ‘/’의 빈틈을 ‘사이 간(間)’자로 채우면 인간(人間)이 된다. 인간(人間)이 되면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생긴다. 결국 시간과 공간이란 인(人)이 인간(人間)이 됨으로써 빗어진 것이다.




/밝

/한/하나//하늘

1

1

보편성(공간성)

천부경

0으로서의 1

부성성/

시니피앙

메이킹(making)

해/하늘(天符)/아(해)들





사이/셋/삶/사람

/

3

(0/∞)

↑↓

↑↓

↑↓

↑↓

↑↓

↑↓



/달

/둘/둘레/따

0

2

일반성(시간성)

불교

1로서의 0

모성성/시니피에

매트릭스

(matrix)

달/지구(地球)/딸(따)

천부경의 중경(中經=地經)은 땅의 원리를 기준으로 천지인의 섭리를 풀어준 것이다. 중경은 천지인으로 말하면 지(地)이고, 원방각으로 말하면 방(方)에 해당한다.


하늘은 둘이면서 셋이고,

땅도 둘이면서 셋이고,

사람도 둘이면서 셋이다.

크게 셋을 통합하면 육이 되고,

칠, 팔, 구를 생한다.

삼과 사를 (중심으로) 운행하면

오와 칠의 환(주변)을 이룬다.

하나는 묘연하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妙衍)


중경(中經)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6(六)자이다. 상경(上經)에서는 1자와 3자가 중요하였지만 중경에서는 대삼합육, 6(2×3=6)자가 중심이다. 6자는 중경의 중심, 중지중(中之中)인 셈이다. 절묘하게도 천부경의 중경의 6자는 중심이 되어 전후로 40자를 거느린다. 다시 말하면 천부경 81(40+40+1=81)자의 중심이다. 6자는 천부경 전체의 중심에 해당한다.

“1+2+3=6이고, 1×2×3=6이다. 그러므로 6은 부(1)와 모(2)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3)을 나타내며, 피타고라스는 6은 생식, 출산을 상징한다고 했다. 남자의 수를 상징하는 3과 여자의 수를 상징하는 2을 합한 5(2+3)는 결혼을 상징하고, 2와 3을 곱한 6(2×3)은 생식, 출산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영어의 ‘sex’라는 말의 어원은 ‘six’라는 것이다. 성은 만물이 탄생하는 바탕과 기본이 됨으로 수의 시작과 끝이 순환되는 기점의 1이 천부수이다. 이 한은 창조주, 우주 또는 신이라 했다. 명은 생명의 에너지인 음양의 운동으로 천부수는 2이다. 정은 에너지의 운동체이다. 정의 운동체 속에 성(1)과 명(2)이 한데 뭉쳐서 회전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 천부수는 3이다. 천부경에 나타난 원(◯)과 방(□)과 각(△)은 단순한 도상만은 아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중경은 원의 중심을 상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중심에서 주변으로 확장되어 가는 우주를 상징한다. 이것은 구체적인 우주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우주이다. 다시 말하면 감각할 수 있는 우주이다. 땅에 사는 인간은 사물을 감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상경이 형이상학에 해당한다면 중경은 형이하학에 해당한다.

그래서 6은 7, 8, 9를 생하고 나아가서 3과 4를 중심으로 하고 5와 7을 주변으로 하는 원을 이룬다. 요컨대 천부경의 ‘중경(中經)’은 ‘땅의 관점’에서 우주를 설명하고 있다. 볼륨이 있는 우주를 ‘중심(중점)과 주변(둘레)’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6은 육(肉, 育, 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천지인이라는 세 변수가 모두 움직여서 입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입체적 운동이다. 천부경의 7, 8, 9를 합하면 24(7+8+9=24)이다. 24절기, 24방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24는 우주전체, 원융상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다.

본래 주역에서도 6은 여자를 상징하고, 9는 남자를 상징한다. 땅은 여자의 것이다. ‘여자=지(地)’이다. 6과 9는 글자의 모양도 반대이다. 남자는 머리가 크고, 여자는 몸이 크다.

“6의 상징을 보면 하늘에는 일, 월, 성, 신, 세, 시(日, 月, 星, 辰, 歲, 時)가 있고, 땅에는 6대주(大洲)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육부(六腑)가 있다. 물의 입자가 6각이고, 눈(雪)도 육각이며, 벌집도 육각이고, 꿀의 입자도 육각이다.”

중경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운삼사성환오칠(運三四成環五七)’이다. ‘운삼사성환오’는 바로 서양에서 말하는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것이다. 중경에 이것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중경은 천지인으로 보면, 지(地)이고, 원방각으로 보면 방(方)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경은 땅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상경의 천(天), 원(圓)은 우주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원 속에는 선을 그으면(운동이 일어나면) 저절로 방(方)이 생기게 되는 데 선은 일정한 비율을 얻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서양철학과 수학에서 말하는 ‘3: 4: 5’라는 피타고라스 정리이다.

동양사상에는 땅을 중심으로 천지인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징할 때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고, 이때 하늘은 흔히 7, 8, 9로 상징된다. 북두칠성의 7수가 그렇고, 복희선천팔괘문왕후천팔괘, 즉 하도낙서(河圖洛西)의 8수가 그렇다. 이들 상징들은 천지의 순환과 변화의 법칙을 말한다. 그리고 천지 순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수는 0이고, 원이다. 10이라는 숫자는 없이 0이 그것을 대신한다.

천부경에서는 우주 자체, 천지 순환 자체를 ‘일묘연(一妙衍)’으로 표시하고 있다. ‘일묘연’은 ‘셀 수 있는(countable)’ 결정론적인 하나가 아니고, ‘셀 수 없는(uncountable)’ 일종의 불확실한 하나이다. 이것이야말로 ‘기(氣)일원론’에 적합한 우주론이다. 우주는 실체가 없는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상징이고, 상징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비율이라는 것은 수의 상징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경은 실체적인 것을 말하는 부분이니까 결국 수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실체인 셈이다. 상징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를 따지는 실체는 아니지만 결국 ‘우주를 총체적으로 보는(봄으로써) 실체(실체에도 통하는)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부경의 하경(下經=人經)은 인간의 원리를 기준으로 천지인의 섭리를 풀어 준 것이다. 하경은 천지인의 인(人)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원방각의 각(角)을 상징한다.


만물이 오고간다.

쓰고 변해도 근본은 움직이지 않도다.

본래 마음은 근본이니 태양처럼 찬란하도다.

사람 가운데 천지가 하나로다.

하나의 끝은 끝이 없는 하나이다.

(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一終無終一)


천부경의 하경(下經)은 천부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장이다. 일시(一始)에서 시작한 천부경은 다시 일(一妙衍)에서 시작하고 있다. 우주만물을 아무리 궁리하고 궁리해보아도 묘할 수밖에 없다. 그 묘함은 연(衍)한, 즉 ‘넘치는’ ‘이어져 있는’ 것이다. 연(衍)은 연(延)이다. 우주는 천지인으로 구분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이어져 있는 하나이다.

하경은 인간의 입장에서 천지인의 섭리를 풀어준 것이다. 대우주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음양오행사상에서 보면 천지인은 인간(人)을 중심으로 하늘(天)과 땅(地)이 대칭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그 중심인 인간의 입장에 따라 천지는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한다. 인간이 통하여 천지를 관통하게 되면 천지가 하나가 되고, 인간이 통하지 못하여 불통하면 천지를 막히게 된다.

하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일중천지일(人中天地一) 구절이다. ‘인간 속에서 천지가 하나가 된다.’ ‘인간 속에서 천지가 소통한다.’ ‘인간의 마음에 천지는 하나이다.’ ‘인간 가운데에 천지가 하나이다.’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이 천지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 속에 천지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천지와 사람이 서로 가역왕래하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서 사람의 모습을 한 신(神) 혹은 하느님의 탄생, 즉 인신(人神) 혹은 신인(神人)의 탄생을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다. 천지라는 양극이 사람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극과 극이 통하여 하나가 됨을 실현하는 셈이다.

사람 가운데 천지가 있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천지를 상징한다는 뜻이다. 이는 동시에 상징의 이중성으로 인해 사람은 천지(天地)=혼백(魂魄)=음양(陰陽)으로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인(人)=천(天)/지(地)라는 뜻이다. ‘/’은 중(中), 혹은 공(空), 혹은 무(無)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의 뜻은 때로는 대립의 ‘벽’(wall)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대칭의 ‘비어있음’(void)이 되기도 하고, 그 표시 자체가 ‘중(中)=공(空)=무(無)’의 의미가 된다.

중심은 비어 있다. 중심은 잡아야 한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잡힐 때에 중심이 잡히는 것이다. 중심은 한 번 잡았다고 그것을 저절로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심은 비어 있기 때문에 항상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있다. 항상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중심이다. 중심(中心)은 그렇기 때문에 공(空)이나 무(無)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 원효는 중심을 마음(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심(一心)을 주장했다.

그러나 말로서 일심(一心)은 주장하는 것이 말로서 일물(一物)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거나 그것의 반대라고 할 수가 없다. 진정으로 일물에 도달한 자는 일물이 일심이고, 진정으로 일심에 도달한 자는 일심이 일물이다. 말로서는 중심에 있는지, 없는 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중(中)은 공(空)이고 무(無)이고 심(心)이다.

인간은 참으로 마음의 존재이고, 마음이란 또한 존재와 존재자를 오가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때는 현(玄) 혹은 현묘(玄妙)라고 하고, 움직일 때는 요(徼)라고 했다. 이것은 또한 정중동(靜中動)이고 동중정(動中靜)이다.




天一一







人一三

人(/ : 天/地)

*人中天地一

中/空/無/心



地一二





*인간의 입장에 따라 천지는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한다. 인간이 통하여 천지를 관통하게 되면 천지가 하나가 되고, 인간이 통하지 못하여 불통하면 천지는 막히게 된다. 그래서 성인(聖人)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서양철학을 동양철학적과 비교할 때, 동양철학 사이의 통함을 천착하고자 할 때, 불교의 공(空)사상이나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잘 거론한다. 그리고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는다. 노장사상은 자연으로 돌아감을 역설하고 있지만, 그 방법론이 없는 것이고, 불교는 바로 그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고등종교의 대열에 합류한다. 불교의 장점은 그 방법론을 마련한 데에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불리하기도 하다.

불교사상의 원천이 실은 노장사상일 가능성이 높다. 인도(네팔)에서 발생한 불교는 중국으로 전파될 때 노장(老莊)사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 격의불교(格義佛敎)로 지칭되고 있지만 실은 이에 앞서 한자문화권의 노장사상이라는 모계적 사상이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석가에 의해 창조적으로 그 시대에 맞게 번안되어 설교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인류문명사적으로 보면 중국을 중심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과 인도유럽어문화권의 경계지역인 네팔에서 일어난 문명적 사건으로, 다시 말하면 모계사회의 사상(경전)이 가부장사회의 경전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도 가부장사회의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연(자연적 존재)에 대해서 깨달음(깨달음이라는 자각)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자연에 그 무엇인가를 덧붙인 것임에 틀림없다. 불교적 깨달음은 자연은 아니다. 존재 자체는 아니다.

원시고대에는 자연 자체, 물 자체에 이르는 방법론을 별도로 가르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거의 하나가 되어(일체가 되어) 살아간(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에는 노장사상은 필연이고, 당연이다. 그러나 문명이 달라졌기 때문에 자연에 이르는 방법론의 제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노장사상은 모계사회의 지혜들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불교는 그 지혜에 도달한 석가가 다시 그것을 환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석가는 왜 그것을 환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여기서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종래처럼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가부장사회와 연결된다. 고등종교라는 것은 가부장사회(왕조사회)의 도래와 함께 제사(祭)가 정치(政)에 적응한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고등종교 가운데서 불교만은 왕에 대해서 깨달음이 우선임을 강조한다. 석가는 왕들의 금은보화의 보시를 평하면서도 언제나 깨달음보다 아래임(보잘 것 없음)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여타 다른 고등종교의 방향과 도리어 역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성을 환기시킴으로써 권력이 허무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교도 가부장사회의 흔적들이 많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자연주의가 좋다고 하더라도 이미 문명은 그렇게 살 수 없었고(모계사회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문명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자연주의를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노장사상이나 불교사상도 실은 외래종교이다. 물론 후대에 그것이 토착화되어 지금은 우리문화의 바탕이 되었지만, 그 원천은 외래적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회복에 대한 연구가 항상 여기에서 그치고 있다. 한민족의 전통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지인(天地人) 사상과 연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말이다. 천지인 사상은 도리어 여러 종교의 원천을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천지인 사상은 샤머니즘에서 고등종교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꿰뚫을 수 있는 모델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박 시인(朴時仁)에 의해 동시에 천지인 사상은 고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사상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선구적으로 연구되었고, 그것은 사실로 입증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천부경은 학자에 따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조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이것은 고도의 상수학(象數學)이고, 상징문화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상징문화는 순환하는 우주를 설명하는 고대의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도 상징은 문화를 설명하는 큰 개념이다. 상징은 서로 차이나는 것이나 상반된 내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언어이다. 음양사상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따라서 상징은 순환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이다. 이에 비해 근대과학은 인과론을 바탕으로 하는 직선체계의 과학이다.

단전호흡을 하는 사람들은 천부경을 인체에 비유하고, 호흡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학자에 따라 천부경의 끊는 부분, 즉 마디의 장절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상경은 머리(상초)=형이상학=상단전, 중경은 가슴(중초)=형이중학=중단전, 하경은 배(하초)=형이하학=하단전으로 말하기도 한다. 본래 상수학이라는 것은 현대의 과학처럼 수를 실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수라는 것은 수를 실체적으로 해석해도 적합성(coherence)을 가질 경우도 있다.

천부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①과 ⑩의 만남이다. 이는 천부경 자체가 순환론의 철학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①의 ‘일시무시일’과 ⑩의 ‘일종무종일’은 만나야 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①과 ⑩ 둘 사이에 ‘/’과 ‘이중성’이 성립한다. 시작은 끝인 것이고 끝인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원융을 달성한다. 이것은 단전호흡으로 볼 때는 운기(運氣)에 해당한다. 소주천(小周天), 대주천(大周天), 기경팔맥(奇經八脈)을 전부 운기하는 것이 된다.

천부경 해석에서 가장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구절이 바로 ‘하경=인경’의 ‘일묘연 만왕만래’이다. 이 구절을 완전히 ‘하경’에 넣는 사람도 있고, ‘중경=지경’에 넣는 사람도 있고, 또 ‘일묘연’만 중경에 넣고 ‘만왕만래’를 하경에 넣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각 상경, 중경, 하경의 글자수가 달라진다. 상경에는 크게 이의가 없다.

한편 상수는 쉽게 말하면 상징적인 수인데, 수는 상수(象數)에서 태어나서 실수로 사용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는 역시 1, 2, 3, 그리고 0이다. 이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0과 1이다. 10진법은 10이라는 숫자를 사용할 수 없다. 0에서 9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10진법은 10을 0으로 표시한다. 0은 숫자의 포스테리오리(posteriori)이다.

이와 반대로 1은 또한 0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0이야말로 숫자를 세기 전에 있는 숫자의 아프리오(a priori)이다. 그래서 진정한 1이다. 1 속에 0이 있기 때문에 1은 2로 나아갈 수 있다. 다른 한편 10은 0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다음 단계의 10 이상의 숫자로 나아갈 수 있다.

천지인의 숫자는 순환론의 숫자이기 때문에 0과 1은 10진법의 처음과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 한 몸의 세트(1, 0)이다. 숫자이든 언어이든 경계선상의 것은 항상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하다.




1

1은 1이면서 0이다.

↑↓



2/3/4/5/6/7/8/9

홀수(3/5/7/9와 짝수(2/4/8)



0(10, 0/1)

10은 0이면서 1이다.

한편 1은 0의 변형이고, 2는 1의 변형이고, 3은 2의 변형이고, 4는 사방(4)의 표시이고, 5는 S(운동)의 변형이고, 6은 다시 1(0의 위에)의 변형 혹은 5의 변형이고, 7은 2의 변형 혹은 북두칠성의 변형이고, 8은 3(∞)의 대칭적 겹치기 변형이고, 9는 6의 변형이고, 0은 원(圓)의 변형이라는 설도 있다. 1, 2, 3은 천, 지, 인을 상징하고, 4는 땅을, 5는 닫힌 세계를 상징한다. 이상은 형이상학의 세계를 상징한다. 6은 육화된 세계, 즉 형이하학의 세계를 상징한다. 6은 또한 여성을 상징하고, 7은 북두칠성 혹은 운명과 행운을 상징하고, 8은 세계의 이중성(운동성)을 상징한다. 9는 남자를 상징하고 0은 원점으로 돌아감을 상징한다. 이밖에도 여러 설이 있을 것이다.

1

2

3

4

5

6

7

8

9

0

0의

변형



1의

변형



2의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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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2/11 [09:10]  최종편집: ⓒ 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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