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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 한글, 그리고 포노로지의 탄생
'제 2회 천부경의 날'학술대회 발표 논문 '소리철학으로 본 천부경'<2>
박정진 철학인류학자 - '소리철학, 포노로지를 제안하며'/소리의 시대로
 
박정진
2) 알파벳, 한글, 그리고 포노로지(Phonology)의 탄생

그라마톨로지가 결국 가부장제와 이성주의와 유대-기독교의 일원적 신학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까닭은 바로 의미를 고정시키려고 하는 때문이다. 이것을 ‘음성의 고정된 의미화’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이성주의(로고스)와 랑그(문자) 중심으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그라마톨로지는 사물을 대상으로 죽인 서양문명의 고백성사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라마톨로지는 포노로지와의 경계선상에 있으며 이미 포노로지를 바라보고 있다.


표음문자

알파벳

유대-기독교 일신론

음성의 고정된 의미화

이성주의(로고스)

랑그(문자)중심

그라마톨로지

한글

샤머니즘

다신론

자연의 소리의 다층화

음성의 시니피앙 회복

파롤(소리)

중심

포노로지

*소리는 처음부터 비어있는 의미이다. 따라서 의미 맥락은 항상 달라질 수 있다

이중성

이에 비해 같은 표음문자인 한글은 인간의 음성의 다층화는 물론이고 자연의 소리의 다층화, 그리고 시니피앙으로서의 음성을 포기한 적이 없다. 이는 한국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샤머니즘(shamanism) 덕분이다. 샤먼은 자연과 인간의 총체적인 소리를 듣는 능력을 가진 사제이다. 이들은 특별한 소의경전(所依經典)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자연이야말로 바로 살아있는 경전이다. 샤머니즘은 처음부터 생존을 위해 에콜로지를 경전으로 하는 자연적(원시적) 종교이다. 샤머니즘은 ‘에콜로지 경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샤머니즘은 에콜로지가 다르면 서로 다른 의식(意識, 儀式)을 가지기 마련이다.

샤머니즘은 물론 다신론이다. 다신론은 서양의 범신론과 같은 것이다. 예부터 샤먼들은 천지인의 소리를 들으면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균형을 꾀한 주술가(呪術家), 지식인, 지혜자, 과학자였다. 여기서 주술가라고 하니까 마치 어떤 속임수나 미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선입감이 들 수도 있지만, 이들은 개인의 욕심, 즉 ‘마음을 비울 줄 아는’ 원시·고대의 지혜자였다.

샤먼들은 몸으로부터 전해오는 우주전체적인, 천지인을 관통하는 신(神)의 신탁(神託)을 받은 인물이미, 마을 지도자였다. 오늘로 말하면 지식인, 지혜자, 과학자인 셈이다. 이들은 더욱이 왕과 사제, 그리고 사제왕(priest-king)을 지낸 인물이다. 샤먼이 왕이 되는 것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왕권의 성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제왕은 모계사회와 가부장사회의 중간에 있다.

샤먼의 가장 큰 특징은 온몸으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앞으로 개인과 집단이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들은 몸에서 생성되는, 살아있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현대인은, 의미는 몸에서 생성되는 것인데 의미를 몸의 밖에 객관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사물처럼 취급하려고 한다. ‘언어=사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문자주의(성서주의)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들의 약속 때문이다. ‘언어=의미’는 아니다. 의미는 근본적으로 몸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해석학일지라도 의미를 죄다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의미를 알려면 ‘소리와 몸의 움직임’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데리다는 서양문명 안에서 한 단어의 의미가 의미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짐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는 수많은 의미맥락의 연결체이다. 이를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이 잘 표상하고 있다. 세계는 수많은 코드, 주파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서양문명은 그 중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수단화할 수 있는 하나만을 고집하는 문명이다. 그래서 그들의 방식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하고, 심지어 황폐화시키고 만다. 서양의 자연과학문명은 말하자면 문제를 발생시키고 그것을 사후에 해결해가는 두더지와 같은 삶의 방식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물론 기독교도 기도나 성령을 중시한다. 가장 샤머니즘을 닮은 것이 서양의 경우, 성령주의라는 것이다. 사제는 오늘의 샤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서양문명이 포노로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절대적인 포노로지를 고집하려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는 성서주의와 역사주의, 그리고 끝없이 의미를 고정시키려고 한다. 이에 비해 포노로지는 의미를 지우려고 한다. 의미를 지워야 다른 의미가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라마톨로지는 ‘하나의 의미지향’에서 ‘이중적 의미지향’으로 향하지만, 이에 비해 포노로지는 처음부터 ‘다중적 의미지향’이다. 포노로지는 ‘다중적 의미지향’ 혹은 ‘다중적 의미수용’이다. 문자는 처음부터 ‘하나의 의미지향’인 반면 소리는 처음부터 ‘다중적 의미지향’이다. 문자는 하나의 의미를 강요하는 반면 소리는 다양한 의미를 수용한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는 문자의 반동이지만, 그 반동의 원천적 힘은 바로 문자에 있다. 이에 비해 포노로지는 처음부터 소리가 문자의 원천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포노로지는 어머니에 비할 수 있다면, 그라마톨로지는 아들에 비할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어머니를 여자로 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되려고 한다. 그라마톨로지는 페니스에 은유할 수 있고, 포노로지는 자궁에 은유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시각과 청각에 은유할 수 있다. 그라마톨로지가 시각(눈)-문자(letter)를 기초한 것이라면 포노로지는 청각(귀)-이미지를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자는 이미지의 하나의 형식(form)이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는 이중성을 지향하지만 결국 문자는 하나의 의미를 강요한다. 포노로지는 다중적 의미를 지향하지만, 결국 자연의 무의미에 도달한다. ‘하나의 의미↔ 이중적 의미↔ 다중적 의미↔ 무의미’는 서로 가역반응을 한다.


그라마톨로지

(grammatology)

아들

아버지

(남자)

페니스

눈(문자)

이미지의 한 형식

이중적 의미지향

포노로지

(phonology)

어머니

여자

(아내)

자궁

귀(소리)

상징적 이미지

다중적 의미지향

(자연의 무의미)

시각은 빛에 의존한다. 시각은 또한 보고자 하는 것을 선택한다. 능동적이다. 이에 비해 청각은 음향에 의존하지만 선택을 하지 않는다(할 수 없다). 수동적이다. 수동적이라는 말보다는 수용적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그러한 점에서 청각은 마치 필름(film)과 같다. 필름은 모든 피사체를 다 담는다. 포노로지(phonology)는 사진(photography)에 비할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의 발명은 서양문명과 인류문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고 혁명이다. 그런데 능동적인 것(시각)보다는 수동적인 것(청각)이 자연에 더 가깝고, 자연을 더 포괄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자연 그 자체이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은 자연의 기운생동 그 자체이다.

시인(예술가)은 자연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과학자는 자연의 문자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에게 의미는 그래서 고정될 수 없다. 이에 비해 과학자에게는 의미가 고정되지 않으면(개념이 되지 않으면) 과학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의 한계는 무엇일까. 이는 과학의 끝을 가보아야 아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말로 할 수 없을 때, 의미를 고정시킬 수 없을 때 그것이 한계이다.

사물은 불확정(uncertainty)의 것이다. 과학은 결국 수단을 취하려고 언어와 사물을 도구적으로 쓴 것의 마지막 결과이고, 이것은 미궁(迷宮)이 아니고 미로(迷路)이다. 미궁은 혼란스럽지만 궁(宮)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미로는 궁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다. 미궁은 미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은 처음부터 미궁이지, 하나의 길을 찾다가 못 찾는 미로가 아니다. 자연은 처음부터 하나의 길이 아니다.

하나의 길을 찾는 자체가 바로 길을 도구화하고 목적화하는 것이다. 하나의 길은 ‘목적이자 대상’(object)이다. 목적과 대상은 도구의 다른 이름이다. 도구는 주체(subject)를 낳는다. 주체와 대상은 결국 같은 것이다. 결국 언어와 사물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언어 자체, 사물 자체에 도달하려면 결국 포노로지로 귀환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의미를 고정시키거나 그러한 경향이 있는 과학과 종교가 아닌 예술이야말로 인류의 마지막 구원이 되는 것이다. 파롤은 그 자체가 언어의 예술이다. 시(詩)가 처음에는 낭송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인(詩人)으로, 예술적으로 언어와 사물을 바라보고 다룰 때 과학과 종교조차도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음(音)의 예술인 음악과 몸의 예술인 무용은 인류를 가장 직접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된다. 몸은 의미를 생성시키고, 음악은 가장 자유로운 의미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는 차선책이다. 자연의 소리와 몸짓을 그대로 들으면 예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대의 예술이 아닌가. 그러한 점에서 결국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소박한 결론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그 모방은 동일한 것을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시시각각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우주를 천차만별로 느껴야 한다. 세계는 차이의 세계이다. 소리야말로 차이의 세계를 가장 잘 대변한다.


그라마톨로지

(grammatology)

:과학, 종교

경전-시각주의-빛

(문자주의, 성서주의)

의미의 고정

(하나의 의미지향)

문자는 채워져 있다

(의미를 독점하려고 한다)

페니스(눈)에 은유

포노로지

(Phonology)

:예술

기도, 염불, 염불선, 참선-청각주의-필름

(불립문자, 교외별전)

의미의 변전

(다양한 의미지향)

소리는 비어있다

(여러 의미가 들어온다)

자궁(귀)에 은유

이성 중심주의로 향하는 범인은 소리가 아니라 문자이다. 표음문자의 표음(소리)이 아니라 표음문자의 문자가 범인이다. 데리다가 왜 이를 착각했느냐 하면 바로 기독교 성경의 일원적 신학에 오래 동안 물든 때문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훈습되었다고 한다. 소리의 본래적 특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데리다가 소리가 ‘제 1기의에 가깝다’라고 한 것은 맞다. 소리는 기의적인 것으로 돌리는 것은 문자로 하여금 기표를 독점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 독점이 절대가 되고, 기의(의미)를 고정시키게 되는 셈이다. 소리를 기의로 돌리는 것은 소리는 문자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포지티브(positive)한 기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리는 기표와 기의의 사이에서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하다.

소리는 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소리는 귀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간다. 귀는 소리를 선택하지 않고,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그대로 받아들인다. 소리는 몸에 저장된다. 그러면서도 소리는 자아(주체)나 정체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소리는 쉽게 다른 소리와 융합(conversion)이 된다. 소리는 물(水)과 같고, 기(氣)와 같다. 저장되고 융합된 소리는 어느 순간에 의미를 생성하면서 떠오른다. 그런 점에서 소리는 매우 존재적이다(존재자적이 아니다).

소리의 기의적 특성이 왜 여성적 특성이고, 사진과 같은 것인지 알아보자. ‘귀=버저이너=사진기’는 네거티브한 공통성을 갖고 있다. 시각은 빛인 양(陽)이 없으면 볼 수가 없고, 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눈을 떠야 볼 수 있다. 그래서 양(陽)이다. 청각인 음(音)은 글자 그대로 귀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어야 하니까 음(陰)이다. 문자시대는 적극적으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으니까 양의 시대이고, 오늘날 전자매체의 이미지시대는 적극적으로 보지 않아도 귀로 듣지 않을 수 없으니까 음의 시대이다. 부연 설명하면 소리는 듣기 싫다고 듣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진도 찍기 싫다고 찍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에, 사진기에 들어오는 것은 전부 받아들여야 하는 네거티브(negative)의 공통성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네거티브이기 때문에 포지티브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지의 특성이기도 하다. 문자는 반대로 포지티브이다. 문자는 포지티브이기 때문에 네거티브이다.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표에 지나지 않고, 본능적이라는 것은 기의에 지나지 않는다. 초월적=기표=초의식, 본능적=기의=무의식이다. 의식은 그 사이에 있다. 그런데 초의식과 무의식은 의식을 기준으로 나누어놓았지만, 이들은 뒤로 만난다. 의식은 분별적이지만 초의식과 무의식은 분별적이 아니다. 분별적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의식이라는 것은 마치 하늘과 땅을 가르는 지평선이나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수평선과 같다. 의식이 없다면 초의식과 무의식은 하나이다. 바로 이 하나(oneness, totality)를 초의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의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초의식은 머리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무의식은 몸에서 유전되는 것이다. 초의식은 문명이고 문자이다. 무의식은 자연이고 본능이다. 초의식=문명=문자, 무의식=자연=본능이다.


문자시대

(책)

양의 시대/기표 중심

활자매체/시각적/이(理)

남성중심/초의식/문명/문자/머리

부계가부장사회

이미지 시대

(사진)

음의 시대/기의 중심

전파매체/청각적/기(氣)

여성중심/무의식/자연/본능/몸

모계여성중심사회

표음문자는 기표를 우선하고, 표의문자는 기의를 우선한다. 표음문자에서는 소리와 문자인 기표가 주도하기 때문에 기의가 기표를 따라야 하고, 이것을 동양의 성리학적 이기론(理氣論)으로 말하면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이다. 표의문자에서는 기표가 기의를 따라야 한다. 이는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이다.

동양의 문장론에 이런 말이 있다. “풍골(風骨)은 모두 기(氣)가 형성한 바에 말미암는다. 풍골은 문학의 작용에 있는 즉, 이것은 기가 문학의 가운데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는 지상의 생명을 활기차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또 항상 생기(生氣)라고 말한다.”

또 “기(氣)는 물(水)이다. 말(言)은 물 위에 떠도는 물(浮物)이다. 물(水)은 큰 반면 물(物)은 떠도는 것이다. 큰 것은 작은 것을 반드시 뜨게 한다. 기는 말과 함께 할 때에 이와 같다. 기(氣)가 성(盛)하면 말은 장단고하가 모두 마땅하다.”라고 한다.

기(氣)와 소리(聲)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기(神氣)는 문(文)의 가장 정밀한 지점이다. 음절(音節)은 문의 다소 거친 것이고, 자구(字句)는 문의 가장 거친 것이다. 그러나 문을 논하면서 자구에 이르면 문의 능사가 모두 끝난다. 대개 음절은 신기(神氣)의 자취이다. 자구는 음절의 법도이다. 시기는 볼 수 없으니 음절로 보게 된다. 음절은 기준으로 삼을 것이 없기에 자구를 기준으로 삼는다.”

또 말하기를 “음절이 높으면 신기가 반드시 높고, 음절이 낮으면 신기가 반드시 낮다. 고로 음절은 신기의 자취이다.”라고 한다.

결국 “옛 사람의 문을 배우려고 하면 그 시작은 소리로 인하여 그것의 기를 구하는 것(因聲求氣)에 있다. 따라서 뜻(意)과 말(詞)은 종종 서로 인하거나 나란히 나타난다. 문법도 이밖에 있지 않는 것 같다.”

시와 음악은 사물을 리듬으로 바꾸는 예술이다. 그러한 리듬을 원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소리(파동체)이다. 시와 음악은 소리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특히 음악은 문자의 방해(의미를 요구하는) 없이 소리를 통해 시간을 따라가는 예술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이다. 음악의 재료인 소리는 마치 자연의 백지 혹은 자연의 바탕인 소(素) 혹은 무한소(無限素)와 같은 것이고, 따라서 그것에 어떤 작은 점이나 선, 획이라도 긋거나 그린다는 것은 ‘소후회’(素後繪)인 것이며, 그것에 어떤 표지를 하는 것은 아무도 범하지 않은 하얀 살결의 처녀를 범하는 것과 같다.

문자와 표지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이다. 소리는 물질(입자)이면서 파동이고, 에너지이다. 음악은 여기에 문화권마다 일정의 형식을 부여한 것이다.




음악(형식)



물질(입자)

소리

파동



에너지



중국 한문은 격조사와 품사, 그리고 어순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성조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 때문에 논리적인 것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 따라서 한문은 쓰는 자에 의해 읽혀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읽는 자에 따라 의미가 해독되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렇게 한자를 배열하면 그것은 읽는 자에 따라 훌륭한 시(詩)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중국인들은 한문을 가지고 논리적인 표현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는 문장의 문법에 의해 결정되는 논리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으로서의 논리성이 그러한 문장을 논리적으로 읽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소리라는 것은 어쩌면 논리마저도 꿰뚫게 하는 마력을 가진 것이다.

중국은 한문의 상형성과 표의성(表意性)을 보완하는 독특한 성조(聲調)를 토대로 하는 음송(吟誦)문화를 만들었다.

≪상서≫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한다.”(詩言志)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뒤에 나오는 구절인 “물에 응감하고 감동하면, 이를 말로 할 때 뜻이 된다”(感物而動 乃呼爲志)이다. ≪원락지악(苑洛志樂)≫(권 8)에는 “시는 본래 마음에서 생기고, 마음은 본래 사물에서 느낌을 받는다.”(詩本生於心, 心本感於物)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의 물(物)이라는 것은 서양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살아있는 물’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사물이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동양의 사물관은 반드시 인간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사물이 중심이 될 수도 있다. 마음(心)과 사물(物)의 가역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란 도리어 사물이 중심이 되어 ‘무엇인가’를 발(發)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동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시(詩)를 흔히 사물 자체라고 말한다. 이때의 사물을 물론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다.

시인이 사물 자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바로 존재론자들이 말하는 물 자체, 혹은 존재가 아닐까. 그렇게 보면 시인은 처음부터 존재론자들이다. 존재는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앞에서 ‘무엇인가’라고 한 것을 ‘기’(氣)라고 말하면 사물이 발하는 기운(氣運, 機運)을 받아서 시인이 시를 쓰게 되고, 그 시는 바로 존재의 교감의 산물이 된다. 바로 그 ‘기운’은 기운(氣韻)이 되어 ‘기(氣)의 운율(韻律)’, 즉 리듬을 타고 시인은 시를 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물심일체(物心一切)의 경지이다.

낭송은 감응만 일으켜서 시를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에도 관통한다는 말이 있다. 시아가쭌(夏살尊)과 예성타오(葉聖陶)가 공동으로 쓴 ≪문심(文心)≫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소리 내어 읽는다는 것은 원래 중요한 것이어서, 옛날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는 대부분 문법도 익히지 아니하고 해석도 중시하지 않은 채, 단지 소리 내어 읽는 일에만 죽자고 노력했다.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낭송하고 낭송했는데, 이렇게 읽다보면 문자도 자연히 통하게 되고, 의미도 저절로 이해되었다.”

소리에는 이상한 마력이 있는 것 같다. 마치 소리가 사물과 공명이 되거나, 아니면 소리의 기와 사물의 기가 공명을 일으켜 서로 하나가 되어 교감이나 소통을 하는 것 같은 이치 말이다.

한유(韓愈)가 쓴 ≪답이익서(答李翊書)≫에 기(氣)의 작용에 대한 구절이 있다.

“기는 물이고, 말은 (물에) 떠 있는 물체이다. 물이 크면 물체는 크던 작던 모두 뜬다. 기가 말에 관여하는 것은 이와 같다. 기가 성하면 말의 장단과 소리의 고하가 모두 마땅하다.”(氣, 水也; 言, 浮物也. 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 氣之與言猶是也, 氣盛則言之長短與聲之高下者皆宜)

결국 말은 기를 탄다는 뜻이고, 기와 가장 유사한 물이 소리이고 보면 말은 소리를 탄다는 뜻이 된다. 소리는 때로는 기호(문자-시니피앙)의 의미(시니피에)가 되고, 다시 소리는 의미를 담는 기호(소리-시니피앙)가 된다. 소리는 이렇게 ‘살아있는 의미’가 되거나 혹은 의미를 담은 기호가 되는 이중의 몸짓을 취한다. 소리의 이중성으로 인해 의미가 소리로 되살아나거나 소리가 의미가 된다(소리↔ 의미). 소리는 기호와 의미의 쌍방소통으로 인해 ‘살아있는 기운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소리 1

문자-시니피앙의 시니피에(의미)

사물의 이면

(메타포)

사이(間: 時間과 空間)의 세계

문자 안에 숨음으로써 사물의 의미(개념)로 내재한다.

소리 2

소리-시니피앙

사물의 표면

(메타니미)

차이(差異)-파동(波動)의 세계

살아있는 기운, 살아있는 세계(실재)를 담는 기호가 된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보다 이성적인 것은,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에 비해 보다 이성적인 것은 소리(음성언어, 파롤)를 의미(개념)로 전환시키면서 결국 문자의 종속적 위치로 전락시킨 데 따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이라는 것도 실은 시각과 개념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과학의 언어(문자)는 건축물의 벽돌장과 같다. 지상의 어떤 건축물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시의 언어(운율)은 처음부터 쌓아진 것이 아니기에 무너질 것이 없다.

시는 결국 자연의 소리를 은유하는 것이며, 은유하고는 바로 자연으로 소리를 돌려준다. 소리언어(음성언어, 파롤)는 발성(발화)과 동시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문자는 역사적이고 존재자적이고, 소리는 자연적이고 존재적이다.


소리언어(음성언어, 파롤)

존재적, 자연적

여성적(청각적)

문자언어

존재자적, 역사적

남성적(시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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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2/04 [09:13]  최종편집: ⓒ 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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