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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도 철학의 현대판 '포노로지'
'제 2회 천부경의 날'학술대회 발표 논문 '소리철학으로 본 천부경'<1>
박정진 철학인류학자 - '소리철학, 포노로지를 제안하며'/소리의 시대로
 
박정진
1. 소리철학, 포노로지(Phonology)를 제안하며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에 대한 철학인류학적 답변

1) 문자의 시대에서 소리의 시대로

―문자학은 음운학의 경계선상에 있다―

“인간은 악기다.”

더 이상 음소는 의미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 ‘의미의 철학’은 인간에게 결코 행복을 주지 않았으며, 급기야 지독한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주의와 과학으로 인해 황폐한 자연과 불행만을 가져다주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의미를 먹고 사는 인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렇게 세계를 이끌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악기다. 비어 있는 악기다. 음소들로 채워져 있다.”

‘의미’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도구로 만들기 위한 사전조치였으며, 그 결과 서로 ‘의미의 중심’이 되기 위해 싸움과 갈등과 전쟁만을 일으켰다.


“포노로지는 무의미의 철학이다.”

인류 역사상 인간은 수많은 의미를 탄생시켰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은 없다. 의미란 자연과 세계를 ‘의미의 경계’로 나누기만 했으며, 결국 세계를 누더기로 만들었다. 누더기의 패치워크(patchwork)가 자연을 돌려주지 않는다.


“나의 포노로지는 풍류도 철학의 현대판이다.”(박정진 말)

풍류도는 바람의 철학이다. 바람의 철학은 존재의 철학이다. 존재의 철학은 소리의 철학이다. 소리의 철학은 개념철학의 종언이다. 모든 존재는 바람처럼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것은 나뭇잎의 흔들림이다. 모든 존재는 바람이고, 흔들리는 나뭇잎은 존재자이다.


문자학(grammatology)은 바로 누더기의 패치워크이다. 인간의 문화와 자연을 천조각, 직물조각(textile)으로 만들어놓고 마치 세계의 의미를 모두 아는 양, 의미의 경계선상을 오가면서 묘기대행진을 벌이면서 자신은 마치 자유인인 양 뽐낸다. 이는 서양 ‘말소리중심주의’ 문화가 스스로의 콤플렉스에 빠져 세계를 직물로 만들어버린 웃지 못한 광경이다.

이제 소리(phone, sound, music)를 의미로부터 해방시키고 더 이상 인간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의 원죄를 덮어쓸 필요가 없다. 아예 의미의 세계로부터 결별하는 것이 세계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문자학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차연(差延)의 묘기’를 벌이고 있지만 포노로지(phonology)는 아예 의미를 버리고 ‘무의미의 세계’로 들어간다. 무의미의 세계야말로 무의식의 세계이고, 무의식의 세계야마로 자연과 본능의 세계이고, 자연과 본능의 세계야말로 영원한 세계이다.

이제 소리는 더 이상 의식과 초의식에 봉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은 악기이다. 악기로 돌아가야 세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문화적으로 편견된 소리가 아닌, 자연의 진정한 소리, 인간이 잊어버렸던 소리를 되찾을 수 있다. 그 소리의 의미는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된 의미이다. 자연의 소리의 파동을 알 수 있어야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옛 샤먼들은 저마다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그 자연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고, 자연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말이란 마음속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내는 것이다.”

말에는 생명의 울림이 있고, 그 울림은 마음과 우주의 몸에 공명을 일으킨다. 말은 로고스(Logos) 이전에 울림이고, 파동이고, 공명이다. 이것을 어찌 로고스라는 감옥에 갇혀있게 하겠는가. 또 울림의 현존(현재성)을 어찌 의식의 차원의 환원이라고 한단 말인가. 말의 울림은 의식은 물론 무의식의 세계, 그보다 더한 물(物)의 세계의 나타남이다. 말을 이성으로 제한하지 말라.

기독교 성경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이 곧 신(神)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때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의 신, 존재신학의 신이 아닌 자연과 동의어의 신이다. 기독교 신학의 문제점은 바로 그 신(존재의 신)을 대상의 신(존재자의 신)으로 고정시킨(절대화시킨) 것이 문제이지, 애초에 말씀이 신이라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수십만 년에 걸친 인간의 생활 속에서 말이 만들어낸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신화다. 신화의 시대에는 신화가 현실의 근거였으며 현실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원리였다. 사람들은 신화가 이야기하는 원리에 따라 생활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는 이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모든 일들이 신화적 사실을 의식의 형태로 되풀이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이른바 실수(實修)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렇듯 신화는 늘 현실과 중복되었던 까닭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의 이야기꾼들이 이야기를 전송하는 목적은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의 근거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신화는 과거의 지나간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사실이나 사건의 근거로서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존재론적인 사실에 가깝다. 다시 말하면 신화는 존재론적 철학이었던 셈이다. 실지로 서양철학이라는 것은 존재론적인 철학인 신화에서 퇴보하여 존재자적인 철학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현대의 인류는 존재를 일어버렸다. 서양의 이성주의 철학과 문자라는 것이 이 실은 가부장사회의 강화의 연장선상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왕조의 성립과 함께 왕의 권위로 현실 세계에 질서가 부여되고 왕이 그 질서를 관장하는 지위를 갖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사실 왕에게 부여된 권위는 왕이 신의 매개자이기 때문에 주어졌던 것이었다. 때문에 그 권위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권위를 갖기에 합당한 자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필요했다. 곧, 신의 뜻이나 신의 뜻에 따른 왕의 행위를 단지 말로만 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를 통해 시간 속에서 정착시키고, 사물에 정착시켜 사실화하는 과정을 통해 나타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야만 왕이 실제로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람이라는 근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서양문명이 주도하는 현대문명은 사물을 수단화함으로써, 자신의 욕심대로(자신의 의도대로) 소유함으로써 사물로 하여금 죽어버리게 하였다. 의미를 버리고 천 조각을 잇는다고 자연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그들에게 돌아가야 맞이할 줄 안다. 가상의 어떤 언어들도, 기호도 문자도, 그 흔적들도 자연을 회복시켜주는 능력(역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인위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자연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차례이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할 때 자신이 처한 문화를 비교문화적으로 잘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문화는 일종의 매트릭스로 생각하고, 전제조건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서 철학을 한다. 그러나 철학자들로 인류학적 연구결과를 참조하고, 인류학자들도 문화권별로 철학적 사고의 유형이 다른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철학적 인류학과 인류학적 철학이 생겨났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인류학을 원용할 때는 대체로 그 결과를 해독하는 ‘텍스트 읽기’의 입장에 선다. 다시 말하면 인류학자들이 수고하듯이 원시미개 사회를 현장조사하거나 장기체류하지 않는다. 또 인류학자들이 고려하는 현지민의 입장에서(emic approach)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류학자들은 철학적 성과를 바라볼 때도 항상 그 문화권의 영향, 다시 말하면 철학자가 소재한 문화문법이 어떻게 철학하는 것에 작용하였는지를 생각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종종 인류학적 철학은 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문화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서양철학자들은 역시 이성주의가 강하다. 이러한 경향은 이성주의를 반대하는 철학자에게서도 냄새가 풍긴다. 오늘의 존재론이나 해체주의 철학자의 대명사인 니체나 하이데거, 데리다, 라캉, 들뢰즈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세계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이고, 서로 반대되거나 대칭되는 것에는 상대의 흔적이 이미 배어 있다. 도리어 어떤 행위의 동인은 상대에게서 이미 출발한 것일 경우가 많다. 여기에 역설과 모순과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의 반이성주의는 이성주의라는 맥락에서 반이성주의이다. 전혀 이성주의가 없는 곳에서의 비이성주의와는 다르다. 이것은 가역반응이나 작용반작용을 하더라도 흔적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동양문화권은 일찍부터 순환주의에 익숙하다. 예컨대 천지인도 순환하고, 음양오행도 순환하는, 말하자면 순환론에 속한다. 서양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순환론은 아무 것도 아닌, 학문이 아니거나 아무런 진전이 없는, 돌고 도는 그런 무의미한 것이다. 이는 서양 사람들은 직선적 사고를 하고, 기껏해야 직선이 이루는 타원이나 원을 생각한다. 이는 서양은 등식(=)을 만들어내는 사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동양문화권은 등식(=)을 만들기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는 순천의 사고, 변화에 맞추어 사는 것에 익숙하였다. 이것은 부등식(>, <)의 사고이다. 이것은 순환 자체를 위한 사고이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는 여러 해석학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변형생성적(변형생성문법적) 해석과 의미생성적 해석이 있다. 전자는 문법(text)에 충실한 경우이고, 후자는 문법보다는 의미가 놓여진 상황(context)에 민감한 경우이다. 특히 의미생성적 해석에는 상황적 해석이 요구된다. 상황적 해석은 반드시 기운생동(氣運生動)을 고려하여야 한다.

기통(氣通)이나 기질적(氣質的) 소통은 바로 일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수많은 의미의 다발을 내포하고 있다. 일종의 다의미의 층이다. 한 기표가 여러 기의를 가질 수 있음과 그것은 언제라도 해체될 수 있음을 데리다가 주장하고 있지만 반대로 서로 다른 기표가 같은 기의를 가질 수도 있다. 더욱이 여러 기표와 여러 기의가 조합을 이루면서 의미의 다발의 교환으로 소통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을 ‘느낌’(feel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종합적 감지(感知), 지각작용을 ‘느낌’이라고 말한다면 느낌이라는 것은 감각과는 다르다. 감각은 감각기관에 의해 감지되지만, 느낌은 어느 특정 감각기관의 감지나 파악에 의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느낄 수 있으며, 감각기관의 정체가 불확실할 수도 있고, 더욱이 제 감각기관의 종합일 수도 있다. 이를 통감(通感) 혹은 직관(直觀), 직감(直感)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체험의 통일적 전체라는 점에서 매우 게슈탈트(gestalt)적이다.

서양이 주도한 철학은 지금까지 ‘나’(I)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오다가 후기근대에 이르러 ‘나’를 포기하고, 그것(It)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나’아닌 것은 모두 반사적으로 ‘너’가 되었고, 이것은 나/너, 주체/대상, 정신/물질, 언어/사물 등의 모방연쇄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모방연쇄(模倣連鎖)라는 말은 ‘실재’는 모르면서 계속되는 ‘재현’(representation)의 찍어내기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재현의 감옥을 의미한다. 모방연쇄는 최초의 절대나 순수를 가정하는 일점근원(一點根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모체연결(matrix networking)은 혼이위일(混而爲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人學

(精神/物質)

인간중심주의

모방연쇄(representation chain)

(나/너, 주체/대상, 정신/물질, 언어/사물)

일점근원

(一點根源)

: 혈통주의

物學

(物)

사물중심주의

모체연결

(matrix networking)

혼이위일

(混而爲一)

: DNA 결합
 

이것을 흔히 인간중심주의, 인학(人學)라고 말한다. 이러한 감옥을 벗어버리고 탈출한 것이 바로 사물 중심의 물학(物學)이다. 물학(物學)의 물(物)은 대상으로서의 물질(정신과 대칭되는)과는 다른 것이다. 물은 이중성을 가진 것이다. ‘물학’을 하다 보니 그동안 칸트 이후에 잠시 버려두었던(정확하게 유보해두었던) ‘그것’(It)을 다시 끄집어내어 논의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 오늘날 인류철학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잘못 되었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Sein)이고, 동시에 당연한(Sollen)의 일이다. 그런데 문제를 그렇게 인간 중심으로 사물을 배열하다보니 삶의 조건으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에 심각한 불균형이랄까, 아무튼 인간의 지혜로도 쉽게 수습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쉽게 말하면 자연을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 셈이다.

그런데 ‘그것’이라는 중성대명사 속에는 아직도 인간중심의 흔적이 남아있다. 서양 사람들은 이 점을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내(인간)가 잘 모르는 ‘대상’을 ‘그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것’이라는 용어에는 사물에 대한 통칭의 의미가 있고, 인간주의의 냄새도 나지 않는 용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더욱이 ‘물학’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유물론(materialism)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것’이라는 용어에는 사용하기에 따라 사물이 죽어버린 것으로 될 수도 있고, 살아있는 것으로 될 수 있는 경계의 의미가 있다. 왜 자연에 대한 통칭이 그것인가. 물론 “비가 온다.”라고 말할 때 “It rains”이라고 말한다. 삼인칭 단수대명사이다. 그런데 ‘그것’에는 어딘가 개개의 사물을 인정하지 않는, 혹은 놓쳐버리는 느낌이 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사물 자체’(Thing itself)를 분리한 느낌이다.

자연은 주체도 아니고, 당연히 대상도 아니다. ‘대상으로부터의 탈출’이 만약 ‘그것’이라면, 필자는 그것보다는 당연하게 원시고대에서부터 인류가 사용한 ‘우리’(We)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서양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삼인칭 복수인칭대명사이다. “We are Korean(우리는 한국인이다).” 그래서 인칭이라는 것에서 인간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에는 개체에 대한 존중이 있다.

인간의 언어라는 것이 사물(사건)의 전체, 혹은 개체에 대해 이름을 불이는 것이지만 전체를 통칭하는 버릇은 철학에서는 매우 나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바로 보편성이라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실은 개체에 대한 무시이다. 실은 개체에 대한 무시야말로 바로 인간주의의 가장 나쁜 병폐이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출발이다. 전체라는 것은 실은 유명(唯名)이고 명분(名分)이고, 가상이고 환상이다. 결국 없는 것이고, 거짓이다.

물론 생각하는 인간이, 더욱이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일(이름 짓기)이고, 표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개개의 사물을 놓쳐버리고, 구체성을 놓쳐버리는 것은 인간 불행의 단초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부분이 전체라는 사물의 유기성(有機性), 생명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사회)를 위해서 부분(개인)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흔히 당연한 일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의 인류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생각하면 바로 그러한 생각이 도리어 전체를 잘못 이끌었다고, 죽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중성(中性)이라는 것, 단수(單數)라는 것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마치 구원의 손짓이라도 되는 양 생각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에 사물을 한꺼번에 통칭하는 ‘대상화’하는 버릇이 남아있다. 사물을 지칭하면서도, 부분을 지칭하면서도 전체를, 전체를 지칭하면서도 부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단어가 바로 ‘우리’라는 단어이다.


인간 중심의 인학(人學)

사물 중심의 물학(物學)

서양철학(존재자의 철학)

존재의 철학

동양 혹은 원시인류 자연주의 철학

나(I)

너(you)

그것(It)

우리(We)

주체

대상





정신

물질





언어

사물






사물을 말할 때도 이제는 사물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뭉뚱그려서 말하는 철학은 아직도 개념의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철학은 단수의 철학이 아니다. 사물은 절대 단수로 있지 않는다. 단수의 철학은 ‘나’(I am)의 반사이고, ‘나’의 반사로 인해 ‘너’는 복수(are)가 되지만 다시 사물 ‘그것’(It)은 단수(is)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사물의 구체성은 없고, 추상성만 있다. 추상성은 보편성을 있게 하는 원천으로 결국 인간을 구제하는 철학이 되기 어렵다. 추상성의 끝에는 명사(존재자)의 차가움만 있다. ‘존재가 무(無) 되는’ 허무(虛無)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때의 존재는 하이데거의 진정한 의미의 존재(存在)도 아니고, 니체의 진정한 의미의 허무(虛無)도 아니다. 물론 하이데거나 데리다, 라캉 등과 같은 천재들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존재에 도달하였지만, ‘그것’에는 추상성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추상성은 무엇보다도 개개의 생명을 무시하는 언어적 습관이 있다. 칸트는 사물을 ‘그것’(Thing) ‘물 자체’(Thing itself)이라고 함으로써 이성중심 시대, 과학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바로 ‘존재와 존재자의 경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철학은 근대 철학의 ‘그것’에서 출발하여 후기 근대의 ‘그것’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phonology)는 새로운 해체철학으로 출발하고 있지만 동시에 추상성의 철학에서 구체성의 철학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다. 소리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물(物)이다.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물(物)이다. 소리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기표이다. 그런 점에서 소리는 가장 실재에 가깝다. 소리는 보이지 않는 물(物)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완벽한 실재이다. 소리는 그러나 존재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쌓아가지 않는 존재이다. 소리는 비존재의 존재이다. 소리는 주체도 없고, 중력도 없다. 소리는 있음과 사라짐 사이에 있으며, 존재 자체가 해체적인 모습으로 있다.


소리(↔)

추상성

구체성

개념(의미)

물(物)

기표

기의(의미)

있음(존재자)

사라짐(존재)

기호(상징)

기(氣)-에너지


사물 가운데서 가장 존재적인(존재자가 아닌) 물질이 소리이다. 소리는 사물과 언어의 경계에 있다. 소리는 사물의 최초의 은유이다. 그래서 소리는 ‘소리=물(物)=언어=개념=은유’ 혹은 ‘소리↔물(物)↔언어↔개념↔은유’이다. 그래서 소리는 개념의 철학을 해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소리는 스스로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를 해체하고, 소리는 동시에 스스로 사물이기에 사물에 화합할 수 있다. 소리는 언어와 사물의 경계, 실재와 언어의 경계,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 있다. 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phonology)의 등장으로 이제 공(空), 무(無)와 같은 개념은 소리(音)와 기(氣) 등으로 바꾸어질 기회를 잡은 셈이다.


소리

형식

음악

문화

문법

생활

언어

문법

언어생활

소리의 혼돈

소리의 질서

포노로지(phonology)


‘소리의 철학’이 왜 필요한지를 시(詩)나 음악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음의 구절이 좋을 듯하다.

“음악(또는 시)은 말 속에 사라져버린 ‘나’로 돌아가게 해준다. 부연하자면, 상징계 안에서의 비존재적인 삶을 죽음의 공포 없이 실재계의 자리로 환원시키는 것이 음악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죽음 없이 존재로 돌아가는 데에 음악만한 것이 없다는 말인데 여기서 ‘음악’ 대신에 ‘소리’를 넣으면 된다. 다시 말하면 소리는 죽지 않고도 존재에 다가갈 수 있는, 존재 자체가 될 수 있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성적이고 추상적이 아닌)이라는 말이다. 물론 소리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상징에 의존한 비존재의 존재이기 때문에 상징의 견고성과 효력의 강약에 따라서 불안감의 강도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프로이드의 말처럼 좀 더 안정되고 견고한 상태의 ‘나’ 곧 타나토스(죽음의 욕동)를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재계의 ‘나’는 상징계를 부정함으로써 도달하는 죽음의 경지이므로, 현실적으로 주체에게는 이것이 쉽지 않다. 여기에 공포가 없는 타나토스의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음악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음악이란 상징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주체에게 죽음의 공포만 제거한 실재계의 견고한 ‘나’로 돌아간 것 같은 환상을 감각하게 해주는 소리이다. (중략) 따라서 음악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또한 디오니소스의 본질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흔히 서양문명에서는 ‘나’(I)가 곧 ‘주체’(subject)가 되는데, ‘나’와 ‘주체’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 주체는 대상이 전제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를 실재계로 보면, 이때의 ‘나’는 ‘너’와 대비되는 ‘나’가 아니라 도리어 ‘자기(self)’의 뜻이 된다. ‘나’와 ‘주체’의 가역성과 이중성은 주체(나)와 대상(너)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서양문명에서는 용인되기 어렵다. 그러나 주체와 동일성을 부정하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소리는 바로 주체와 대상이 없는 대표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포노로지’ 철학의 소리는 생사를 초월한, 존재 이전의 존재, 존재의 근원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감각하게 하는 것으로 소리를 설정하고 있다. 포노로지는 소리의 혼돈과 소리의 질서 사이에 있다. 포노로지 철학이 음악과 다른 점은, 음악처럼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그때그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의미를(산발적으로 있는) 찾아가는 철학이다. 그래서 언제나 자연의 소리, 창조적인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 포노로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기적인 세계와 교감을 하려는 고정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도 함께 포노로지의 파동(波動)과 울림(공명)에 참가하여야 한다.

종이와 문자의 활자매체의 시대가 지니고, 이제 전자와 컴퓨터, 핸드폰과 스마트폰의 전파매체, 멀티미디어 시대가 되었다. 이는 문자보다는 소리가 훨씬 더 편리한 소통의 도구라는 것을 말해준다. 문자야말로 전파로 전환되어야 쉽게 전달될 수 있다. 문자도 이미지의 일부이다. 이미지를 문자나 텍스트라고 하기보다는 문자나 텍스트를 이미지라고 하는 편이 훨씬 미래지향적이다. 인류의 미래는 의식과 문자의 시대가 아니라 무의식과 소리의 시대이다. 그래서 포노로지 철학이 필요하다. 소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는 브리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미디어와 예술, 철학의 진화와 상관관계를 보면 포노로지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미래에는 파동학(waveology)이 만들어질 것이다. 세계는 결국 원시종합예술의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철학과 예술이 점차 주체와 객체(대상)의 이분법에서 멀어지면서 결국 ‘세계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이를 심물일체(心物一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문학), 그림(미술)을 중심으로 하면 결굴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에 머물게 되고, 소리(음악)로 넘어가게 되면 포노로지(Phonology)의 단계가 된다. 포노로지는 단순히 소리의 문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음파에서 파동의 세계로 인도하게 된다. 파동의 세계는 바로 복합매체(복합매체 예술)의 세계이며, 전기전자전파의 세계가 된다. ‘기’(記)는 ‘기’(氣)이다. ‘기’(記)에서 ‘기’(氣)로 넘어가야 한다. 기호(記號)의 기(記)로서는 부족하다. 에너지의 기(氣)로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포노로지가 있어야 하는 당위이다.

복합매체의 시대는 실은 원시종합예술로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발전이라는 의미의 진화는 없다. 진화는 단지 변화나 차이의 과정, 여정에 불과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을 우주를 향하여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샤먼은 과학에 대칭되는 미신(迷信)을 믿게 하는 사제가 아니라 ‘우주를 향하여 일찍이 자신을 버린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샤먼이야말로 실은 ‘주인과 노예를 연극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포노로지에 의해서 달성되는 ‘소리=귀=수용적(수신자 중심)=우주적 교감=소통-되기’는 샤머니즘을 이해하는 가교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문자에서 파동, 그리고 우주적 교감>


문자

그림

소리

복합미디어

원시종합예술

세계는 하나이다

문학

(letter, text)

미술

(line, image)

음악

(sound)

멀티미디어 예술

(multimedia art)

춤, 굿 샤머니즘

(shamanism)

문자학(grammatology)

소리(phone)를 희생하여

세계를 텍스트(text)로 환원

포노로지(phonology)

음파(音波)

파동학

(waveology)

파동의 우주

(전기전자전파)

느낌(feeling)

결과적 소통

(소통-되기)

수용적(수신자)

의식/의지(현상학)

(존재자론)

의식/무의식

(존재론)

무의식

(자연)

우주적 교감

(心物一體)

* 주체와 대상에서 점차로 간격이 허물어진다.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기호(記號)의 기(記)’에서 ‘에너지의 기(氣)’로 넘어가야 한다.


‘문자-이성’ 중심의 서양문명은 여전히 문자(letter)을 숭상한다. 포노로지는 이에 비하면 이미지(image)의 철학이다. 포노로지는 언어의 ‘음성(소리)과 문자’의 두 기표 가운데 소리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는 말소리중심주의의 원죄를 뒤집어 쓴, 알파벳문명권의 소리(phone)를 방면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소리는 한없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포노로지에 의해서 인간(인간의 언어)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소리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소리는 자연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이 책의 첫머리에서 제기한 소리(phone)와 기(氣)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상기해보자.

 

‘말-소리중심주의’(logo-phonocentrism)

=말중심주의(logocentrism)’

*소리(phono)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정기신(精氣神)에서 기(氣)가 빠짐

‘정신=절대신=이성(理性)’

*기(氣)=소리(phone)


필자가 제기한 “정기신(精氣神)에서 기(氣)가 빠지는 것과 말소리중심주의에서 소리(phone)가 빠지는 것이 결국 같은 이성 중심주의를 초래하게 된 셈이다.”라는 구절을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할까? 답은 이렇다. 포노로지(phonology)철학의 탄생이 필요하고, 포노로지 철학은 기(氣)철학의 회복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포노로지 철학은 정기신을 회복하는 철학의 원시반본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이제 기(氣)라는 개념에 의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언어적으로,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포노로지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중심주의 철학의 종말이면서 동시에 기(氣)철학의 새로운 탄생이 된다. 이것을 철학의 종말과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鳥, 鸞새)가 우는 소리는 들리는데 새는 보이지 않는다. 바람(風)의 소리는 들리는데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존재는 울린다. 시각중심으로 보면 소리는 없는 것이 되지만 청각 중심으로 보면 소리는 가장 변화무쌍한, 가장 존재다운 존재이다. 소리는 최초의 은유이면서 기(氣)이다. 소리야말로 일반성의 철학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질료 아닌 질료이다. 소리는 일반성의 철학의 근거이면서 탈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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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0/16 [10:09]  최종편집: ⓒ 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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